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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Jun 23. 2022

나중에 결혼하실 분이 부럽네요

 오래전 공공도서관에서 근무하던 때의 이야기다. 공공도서관은 보통 다양한 연령층의 이용 편의를 위해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운영이 되는데, 모든 직원이 총 13시간이나 되는 이 시간들을 모두 감당할 수는 없기에 오전 조, 오후 조 두 개로 편성을 하여 운영을 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때 당시 나는 이중 오후 조(오후 1시 ~ 밤 10시)에 편성이 되어있었는데, 직원들이 밤에 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도 있었고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남들이 기피하는 오후 조에 흔쾌히 지원하게 되었다.


 근무를 한지 한 달여가 되었을까? 이제 이용자들의 얼굴이라든지, 성향이 어느 정도 익혀졌기 때문에 업무가 편해질 거라 생각을 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발단은 월 초에 신간도서가 들어오는 순간부터였다. 주말은 말할 것도 없고 평일에도 꽤 많은 이용자들이 방문하는 도서관이었기에 직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는데, 여기에 신간 도서 업무가 더해지게 되었으니 다들 새로 들어온 책을 보며 한숨부터 쉬기 시작했다. 게다가 도서관에 있는 사서는 네 명. 오전 조, 오후 조 각각 두 명씩 나누어져 있었기에 한 명이 전담해서 신간도서를 맡을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직원들은 누구든지 시간이 날 때 틈틈이 신간 도서 작업을 하자고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서로 얼마만큼의 분량을 맡아서 한다는 것을 정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 된 것일까? 처음에는 신간 수서 작업이 조금씩 진행되는 것 같았는데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나 빼고는 아무도 이 일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서로에 대한 불신과 이기심이 그 원인이었다. 오전 조의 사람들은 작업이 남아있는 신간 도서를 보며 '오후 조에는 사람도 잘 안 오는데 왜 신간 작업을 많이 안 해놓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나와 같이 일하던 오후 조 직원은 '누구는 오전에 일 안 해봤나? 시간 내서 하면 충분히 하겠구먼 바쁜 척만 하면서 손도 까딱 안 하네.'라는 생각을 했다. 이런 생각의 차이와 갈등의 골이 깊어졌던 탓에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를 질책하기 시작했고, 그럴수록 일은 더 내팽개쳐졌다. 그때 당시 직원들의 자존심 싸움이 얼마만큼 강했느냐 하면, 오전 조 직원분은 가정사를 이유로 거의 매일 조퇴를 했고, 이에 질세라 나와 같은 오후 조의 직원은 휴가를 사용하라는 공문을 이행하겠다면서 근 일주일 가량 휴가를 써서 자리를 비워버렸다. 결국 이 싸움 때문에 행정을 전담했던 직원 한 분이 오전 업무를 모두 맡게 되고, 나는 혼자 오후 업무를 보게 되고 말았다.

 

 두 사람이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은 사람의 일이니 그럴 수 있다 생각했지만 계속 남게 되는 신간도서 업무가 계속 신경 쓰였다. 수서 업무가 늦어질수록 이용자들이 신간을 대출할 수 있는 기회도 늦춰지는 데다가, 나 스스로도 그 책들이 계속 눈에 밟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나는 잠깐의 고민 끝에 '그래 뭐 혼자 빡세게 하면 한 2주일 정도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혼자 신간 업무를 도맡아 하기 시작했다. 긴 북트럭 세네 개 분량의 책들을 가까이 가져와서는 저녁에 손님이 오면 카운터에서 대출, 반납 작업을 하고 사람들이 뜸하거나 책을 읽는다 싶으면 신간 앞으로 달려가서 수서 작업을 했다. 책 표지 부착, 등록번호 일치 여부 확인, 청구 기호 부착, 기타 도장작업이나 MARC(책의 정보를 시스템 상에 기입하는 작업) 업무까지. 처음에는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서 우왕좌왕했지만 점점 노하우가 생기면서 작업은 물 흐르듯이 착착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때 거의 매일 내가 혼자 작업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저녁 늦게까지 남아 도서관 내부를 청소해주셨던 50대 남짓으로 보이는 미화원 여사님이셨다.


 저녁에 홀로 신간 작업을 계속한 지 약 일주일 정도가 지났을 무렵, 입구 자동문 소리가 '위잉-'하고 나길래 나는 손님인가 싶어서 데스크로 달려 나갔는데, 알고 보니 그 미화원 여사님이 청소를 위해 들어오시는 거였다.


"오늘도 혼자 작업하고 계시네요? 전부터 자주 그러시더니."

 

 미화원 여사님께서 버선발로 헐레벌떡 달려 나온 나를 보며 위로차 말을 걸어주셨다.


"네, 이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서요.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거, 그냥 제가 시간 내서 틈틈이 하고 있습니다."


 내가 웃으면서 어깨를 으쓱 하니 여사님께서는 대단하다면서 나를 칭찬해주셨다. 그러고는 내가 작업을 하고 있던 북트럭 앞을 슬쩍 훑어보셨다.


"쓰레기 버릴 거 있어요? 치워드릴게요"

"아이고, 아닙니다. 조금 버릴 게 있긴 한데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과자 부스러기부터 아이들이 더럽힌 소파 얼룩 청소까지 매번 꼼꼼히 청소를 해주시는 여사님이셨기에 죄송한 마음이 들어 혼자 청소하겠다고 말을 했는데, 여사님은 그저 웃으시며 내가 내가 작업하던 곳에 우수수 떨어져 있던 종이며 테이프 조각들을 깨끗이 치워주셨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매번 이런 걸로 고맙다 하시면 안돼요."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정리가 끝날 무렵 감사의 인사를 건넸는데, 여사님께서는 당연한 것이라며 손사래를 치셨다.


 순간 훈훈한 기운이 주변을 감도는 것이 기분이 좋았지만, 번뜩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북트럭 앞에 자리를 잡았다. 쓰레기들을 비운 후 자료실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조심스레 확인하시던 여사님은 내가 앉은자리 뒤편 자료실이 비어있다는 것을 눈치채시고는 뒤편에서 걸레질을 시작하셨다. 밀대 걸레가 뽀득뽀득 소리를 내는 것이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여사님이 내게 말을 거셨다.


"참 선생님은 대단하시네요. 말도 없고 조용하신데 또 착하시고, 성실하기도 하고."


 나는 그 말씀에 '내가 말이 없었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이내 싱긋 웃었다. 그리고 장단을 맞추듯 여사님께 말을 건넸다.


"저는 오히려 여사님께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항상 친절하시고, 먹을 것도 자주 사주시고, 일이 고되실 텐데 출근할 때마다 항상 웃으면서 반겨주셔서요."


 나의 말이 끝나자 여사님은 칭찬을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시더니 "예!? 아이고, 아니에요."라며 엄청 쑥스러워하셨다. 그리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내비치셨다. 항상 여사님을 보면서 떠올린 생각들이었기에 나의 말에는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그렇게 대화의 마무리를 위해 내가 "좋은 말씀 해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라고 하니 몇 초 뒤에 여사님이 웃으시면서 내 기억에서 잊히지 않을 말을 툭하고 건네셨다.


"누가 될지는 몰라도 나중에 결혼하실 여자분이 참 부럽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또 한 번 감사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생전 처음으로 말에 힘을 불어넣는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연륜과 경험에서 흘러나오는 내공. 흔한 단어가 아닌, 자신만의 언어로 다른 사람을 칭찬하는 것에서 이토록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이 느껴졌다. 이후 나는 "노력해보겠습니다."라는 답변을 하며 크게 웃었는데, 여사님께서도 그에 맞추어 크게 웃으셨다. 그렇게 이용자가 아무도 없었던 게 정말 다행이라 여길 만큼 한동안 자료실 안은 데시벨이 높은 웃음소리로 가득 채워졌다.


 그로부터 몇 주 뒤, 일은 잘 마무리되었지만 여사님의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아서, 나는 어머니께 저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짝 물어보았다. 어머니는 "뭐 그냥 잘하고 있다는 뜻이려니 생각해라."라며 칭찬 아닌 칭찬을 해주셨는데, 그렇구나 하며 긍정이 되면서도 무언가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행복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며 그때의 추억을 되돌아보니, 나는 다시 한번 그 여사님의 인품에 감사함을 느낀다. 또 내가 가진 장점은 살리고 단점들을 줄이면서 나를 좀 더 가꾸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나도 언젠가는 여사님처럼 나의 삶과 철학이 담긴 '어른의 언어'를 누군가에게 건네게 되는 날이 올까? 말하기에 앞서 언어 속에 깊이와 향기를 담아내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하기에, 내 삶의 자세부터 한 땀 한 땀 가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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