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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다 Oct 10. 2023

아무렇지 않은 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잔잔한 바람이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흰 털을 가진 새끼 고양이 몇 마리가 좁은 골목을 뛰어다니고, 옻칠이 반쯤 벗겨진 나무 지팡이를 쥔 할머니가 느릿느릿 비탈길을 오르는 풍경. 그 모습은 내게 그리 흥미로울게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퍽 미소가 지어졌다.


 하루 종일 그렇게 화낼 일도, 웃을 일도 없이 무던히 지나갔던 하루. 눈을 깜빡이면 어느새 잊히게 될 수도 있는 쉬운 하루에 불과했지만, 나는 그런 하루에 문득 감사해졌다.


 심한 몸살에 걸려 홀로 방 안에서 끙끙 앓던 날들. 쓸데없는 오해와 다툼으로 밤새 머리를 싸매야 했던 날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고민하며 깊은 한숨을 쉬던 날들까지. 지금과는 다른 소란스러운 날들을 수없이 겪어왔다 보니, 이런 잔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는다.


 바다와 같은 깊음을 안고 살자고 매번 되뇌곤 하지만 여전히 어렵기만 한 세상. 나는 차디찬 바깥을 등지고 다시금 단단한 현관문에 손을 얹는다. 내일 마주할 세상은 조금 더 잔잔해져 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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