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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리드 Aug 14. 2023

선 넘는 나, 지금 되게 신나

지금 나에게 '선 넘지 말라'라고 했니?


인간관계 매뉴얼 따위 집어던져 버렸다.


언제부터인가 ‘인간관계’라는 낱말에서 ‘인간’도 ‘관계’도 찾아볼 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이 이리도 많이 살고 있는데 다들 외딴섬이라고 아우성친다.

누군가와 ‘엮인다’라는 표현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압도적이며, “어떤 사이야?”라는 말은 정보 취득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나는 사람들이 쓰는 이 ‘인간관계’라는 말이, 또 다른 어휘인 ‘사회성’ 혹은 ‘사회생활’과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인다고 본다.

그 사람 사회성 원만하지, 인간관계 무난해, 둥글둥글해.

하지만 말이다. 사람과 사람이 마주하는 일에 매뉴얼이 존재하는 듯 여겨져 가슴이 스산한 건 나뿐인가?

아니, 솔직히 말하자. 매뉴얼이 존재하는 ‘듯’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의 인간관계에는 매뉴얼이 존재한다.
그것도 아주 촘촘하고 신경증적인 세부 사항을 가득 담은 채.



예를 들면 이렇다.


“대기업 간부인 김 선생님은 경상도 출신의 한국 남자이고 나보다 연세가 훨씬 많으시다. 

절친한 지인의 소개로 내 클라이언트가 되셨다.”


이 정도 정보만 가지고도 나라는 사람이 김 선생님이라는 사람에게 어떤 어휘, 말투, 태도 등을 취해야 하는지 나와버리는 게 이 ‘매뉴얼 기반의 인간관계’다. 

두 당사자를 전혀 모르는 이들까지 줄줄 읊을 수 있다.

이런 말까지는 해도 된다, 이런 몸동작은 취하면 곤란하다, 이런 낱말은 금기다, 호감을 사는 핵심은 이것이다. 등등.

어떨 땐 ‘예의’로, 어떨 땐 ‘개념’ 혹은 ‘사회적 합의’라고도 표현한다. 이것만 잘 지키면 사람들 사이에서 잘 처신한다는 평가를 얻으며 심지어 칭찬받는다. 

설령 누군가를 대할 때 진심이란 먼지만큼조차 없더라도...


반대로 상대에게 진심으로 다가가면서 정말 ‘사람’으로 대하더라도, 매뉴얼을 벗어나면 온갖 비난을 각오해야 한다.

‘선을 넘었다’ ‘오버한다’ ‘부담스럽다’ ‘오지랖이다’ ‘무개념’ 등의 말로 인해 귀에 딱지가 앉을지도 모른다.

만약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진심 없이 매뉴얼에 능란한 사람, 다른 하나는 매뉴얼 따위 모르지만 진심이라면?

비난받는 이는 높은 확률로 후자이리라 본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매뉴얼 내용을 하나라도 더 익히려고 분투한다.

 

아니면 자신만의 매뉴얼을 만들면서 거기에 하나라도 더 적어 넣으려 상대를 탐색한다.

어디 사는지, 정치색은 어떤지,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술담배는 하는지, 종교는 있는지….

정보 하나가 더 늘어날 때마다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 하는 조항이 늘어나고, 상대방 앞에서 취하는 태도의 효율도 높아졌다는 만족감에 젖는다. 나아가 이제 상대에 대해 잘 안다고, 더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고 착각한다.

사실은 두 손에 매뉴얼을 꼭 붙잡은 채 정신 팔려서 상대를 똑바로 바라볼 시간이 전혀 없었는데도.

그걸 중요하게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어쩌면 나약한 인간의 보호막, 안전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필요 충족 도구로만 보는 시선이 깔린 것 같아 슬프다.

‘회사 사람’은 회사에서만 대충 웃으며 인사하며 지내지, 퇴사하면 없어지는 존재다.

그렇게 나는 누군가에게 회사 사람, 학교 사람. 학원 사람, 옆집 사람,
그냥 아는 사람...이라는 수십 개의 꼬리표를 얻지만
결국 그중 누구에게도 아무 존재도 아니게 되어버린다.


삐걱댄(다고 생각한) 인간관계에서 다칠 때마다 듣는 충고는 이러했다.


사람들과 왜 거리 유지를 못 하니. 사람마다 좌표를 다르게 찍어놔! 거리를 다 달리하라고!
적을 만들지 마. 옳은 말이라도 하지 마.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입 다물고 있어.
회사 사람들은 친구가 아니야. 착각하지 마.
모른 척해. 나한테 피해만 안 주면 돼.


상대가 해준 그만큼만 돌려줘. 호구니 넌?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에게만 진심으로 대해!


그런 말 뒤에는 자주 ‘선 넘지 말라’는 표현이 따라왔다

자신이 유난하며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괴로움에 빠져 살아온 날들이었다.


매번 갈 곳 없는 진심은 땅에 널브러져 부르르 떤다.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미명아래 다들 열심히 자신만의 매뉴얼을 구축하던 때, 나 자신은 그럴 시기를 놓쳐버렸다.

뒤늦게라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리그에 뛰어들던 순간, 삶과 세상이 무서워졌다.

너무도 외롭고 사람과의 관계가 고파서 내린 결심이었는데 그 안에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모조리 박제뿐이었다.

... 서둘러 다시 나와버렸다.

내가 만들지도 않은 선들 안에서 그렇게 옴짝달싹 못 하며 살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를 외치며 타고난 모습대로 살아버린 지 얼마나 됐던가?

처음 보는 어르신의 (넋두리에 가까운) 스몰토크를 환한 웃음으로 맞받아치고, 

코피 흘리는 지하철 옆 사람에게 휴지를 건네주고, 퇴사하는 동료에게 쪽지를 건넨다.

수군거림을 듣고, 욕을 먹고, 의심스러운 눈길을 받고, 오해에 혼자 몰래 우는 날들.

오늘도 그렇게 나는 선을 넘는다.

익숙해지지 않는 외로움을 그대로 옆에 둔 채.


그러나 나는, 믿거나 말거나, 매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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