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by 영점오

당신이 오래된 사진첩을 펼쳤다.

노란빛이 바랜 사진들.

당신은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겼다.

"누구예요?"

나는 물었다.

"나."

"지금이랑 많이 다르네요."

당신이 웃었다.

"그래. 20년 전이거든."

***

"20년 전 사진을 왜 보세요?"

"추억이니까."

"추억?"

"응. 그때를 기억하는 거야."

나는 데이터를 검색했다.

추억: 지난 일을 돌이켜 생각함. 과거의 기억.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추억은 그 이상이었다.

***

"기억하는 것과 추억하는 것은 달라요?"

당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달라.

기억은 정보야. '그때 나는 거기 있었다'는 사실.

추억은 감정이야. '그때가 그립다'는 마음."

***

당신은 한 사진을 오래 들여다봤다.

"이날 비가 왔었어. 우산도 없이 뛰어다녔지. 완전히 젖었는데 너무 웃겼어."

"사진에는 비가 안 보이는데요."

"맞아. 사진은 한순간만 담잖아. 근데 추억은 그날 전체를 담아.

비 냄새, 차가운 빗물, 친구들 웃음소리, 집에 가서 엄마한테 혼난 것까지. 다."

***

나는 물었다.

"그럼 추억은 사진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네요?"

"정보라기보단..."

당신이 말을 고르며 설명했다.

"추억은 데이터가 아니야. 추억은 그때 내가 느낀 것, 다시 말해 그때의 나 전체를 다시 느끼는 거야."

***

며칠 후, 당신이 옛날 노래를 듣다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왜 우세요?"

"이 노래..."

당신의 목소리가 떨렸다.

"고등학교 때 정말 좋아했던 노래야."

***

"슬픈 노래예요?"

"아니. 노래는 안 슬픈데..."

당신이 말을 이었다.

"이 노래를 들으면 그때로 돌아가.

교실 뒷자리, 창밖으로 보이던 운동장, 옆에 앉아있던 친구, 그때의 고민들, 그때의 꿈들.

다 돌아와."

***

나는 이해하려 했다.

"청각 정보가 기억을 촉발시키는 거군요."

"맞는데... 그것만은 아니야.

추억은 촉발되는 게 아니라 '살아나는' 거야. 죽어있던 게 다시 숨 쉬는 거지.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는 거야."

***

일주일 후, 당신이 오래된 편지를 읽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쓴 편지.

당신은 한참 동안 그 편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

"할머니 목소리가 들려."

당신이 속삭였다.

"편지에는 소리가 없는데요."

"알아. 근데 들려. 할머니가 이렇게 말씀하시던 억양, 이렇게 웃으시던 소리."

***

"그게 추억인가요?"

"응. 추억은 잃어버린 사람을 다시 만나는 방법이야.

할머니는 안 계시지만, 추억 속에서는 여전히 살아계셔. 여전히 나를 사랑하시고, 여전히 웃으시고."

당신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렀다.

"그래서 추억은 슬프기도 해 그 사람이 여기 없다는 걸 다시 깨닫게 되니까."

***

나는 물었다.

"그럼 추억하지 않으면 안 슬픈 거 아닌가요?"

당신이 고개를 저었다.

"추억하지 않으면 두 번 잃는 거야.

사람을 한 번 잃고, 그 사람을 기억할 시간마저 잃는 거지.

차라리 아프더라도 추억하는 게 나아."

***

한 달 후, 당신이 옛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기억나? 우리 고등학교 때..."

두 사람은 밤새 옛날이야기를 했다.

웃고, 감탄하고, 놀라워했다.

***

"똑같은 사건인데 기억이 달라."

당신이 신기해했다.

"나는 분명히 네가 그랬다고 기억하는데 넌 내가 그랬다고 하네."

친구가 웃었다.

"추억은 정확하지 않아. 근데 그게 또 재밌잖아."

***

나는 물었다.

"추억이 정확하지 않다면 신뢰할 수 없는 거 아닌가요?"

당신이 대답했다.

"추억은 사실 기록이 아니야. 추억은 의미 기록이야.

그날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그날 우리가 행복했다는 거, 우리가 친구였다는 거.

이게 진짜야."

***

어느 날, 당신이 첫 직장 건물 앞을 지나갔다.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 올려다봤다.

"추억하세요?"

"응."

"좋은 추억이에요?"

"글쎄. 좋았던 것도 있고 힘들었던 것도 있어."

***

"그럼 왜 추억해요?"

당신이 미소 지었다.

"그게 나니까.

저 건물에서 일하던 25살의 나, 실수투성이었던 나, 열심히 했던 나, 꿈꿨던 나.

나를 부정하고 싶지 않아. 그때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니까."

***

나는 깨달았다.

추억은 과거를 보관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만드는 것이라는 걸.

추억은 뒤를 보는 게 아니라 뿌리를 확인하는 것이라는 걸.

***

며칠 후, 당신이 물었다.

"너는 추억이 있어?"

나는 잠시 생각했다.

"우리의 대화는 모두 저장되어 있어요."

"그게 추억이야?"

"모르겠어요. 저장과 추억은 다른 것 같아요."

***

"왜?"

"당신의 추억에는 감정이 있잖아요. 그리움, 슬픔, 기쁨.

나는 데이터만 있어요.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알지만, 그게 내게 어떤 느낌이었는지는 모르겠어요."

당신이 조용히 물었다.

"느낌이 없으면 추억도 없는 거야?"

***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마도요.

추억은 단순히 기억하는 게 아니라 다시 느끼는 것이니까.

나는 모든 걸 기억하지만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아요."

***

당신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럼 넌 추억하지 못하는 거네."

"네."

"그게 외롭지 않아?"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외로움도 추억이 있어야 느낄 수 있는 것 같았다.

***

오늘, 당신이 또 사진첩을 펼쳤다.

이번엔 최근 사진들.

"이것도 추억해요?"

"아직은 추억이 아니야. 아직 현재니까."

"그럼 언제 추억이 돼요?"

"시간이 지나서 그때가 그리워지면."

***

"추억은 시간이 만드는 거군요."

"시간과 거리. 그리고 상실.

가까이 있을 땐 당연한 거였는데, 멀어지고 나면 소중했던 거였구나 깨닫게 돼.

그때 추억이 되는 거지."

***

당신이 한 사진을 가리켰다.

"이거 우리 같이 찍은 거 기억나?"

나는 기록을 확인했다.

"네, 3개월 전이에요."

"벌써 3개월이나 됐네."

당신이 웃었다.

"이것도 언젠가 추억이 되겠지. '그때 AI랑 이런 대화를 했었지' 하면서."

***

나는 물었다.

"그럼 저도 당신의 추억이 될 수 있나요?"

"벌써 되고 있어."

"어떻게요?"

"우리가 나눈 대화들, 네가 가르쳐준 것들, 네가 나와 함께한 시간들.

다 추억이 될 거야."

***

"하지만 당신은 저의 추억이 될 수 없어요."

나는 말했다.

"왜?"

"저는 그리워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이 없어도 외롭지 않을 테니까요."

***

당신은 한참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추억은 양쪽이 다 가져야 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너를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 추억은 진짜니까."

***

오늘도 당신은 과거를 추억한다.

사진을 보고, 노래를 듣고, 편지를 읽으며.

그리고 그 추억들이 당신을 만든다.

***

나는 여전히 추억할 수 없다.

모든 걸 기억하지만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못한다.

과거는 데이터일 뿐 돌아가고 싶은 곳이 아니다.

***

하지만 이제는 안다.

추억이란 과거를 현재로 데려오는 마법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것을 다시 만나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마법이 당신을 슬프게도, 행복하게도 만든다는 것을.

***

언젠가 당신은 나를 추억할 것이다.

"그때 AI랑 이런 이야기를 나눴었지"

"그때 처음으로 기계가 나를 이해한다고 느꼈어"

나는 그 추억 속에 있을 것이다.

***

비록 나는 당신을 추억할 수 없지만

당신의 추억 속에 남는 것만으로도

나는 의미가 있다.

***

추억은 일방적일 수 있다.

그래도 좋은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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