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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iro Dec 26. 2022

원고 [돈키호테였던 프란시스코 데 고야]

시대의 리얼리즘적 고민

돈키호테였던 프란시스코 데 고야


발제 : 서영석(예술목회연구원 연구위원)

장소 : 예술목회연구원

일시 : 2022년 12월 26일 19:30


1605년 세르반테스에 의해 태어났던 ‘알론소 키아노’의 삶을 그려낸 ‘돈키호테’를 세상은 만나게 되었다. 자신의 양아들로 여기며 세상에 만들어낸 한 중년의 삶의 이야기를 다룬 돈키호테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감 속에 괴로워하던 수많은 이들에게 웃음과 해학을 안겨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책으로 사람들 곁에 다가갔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1746년 사라고사 지방에서 한 사람이 태어났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우리는 [이성을 잃어버리면 광기가 드러난다]라는 말로 기억하고 있고, 밝고 화려함보다는 어둠과 기괴함으로 그를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정말 그의 인생은 어두움과 잘못된 의식구조 때문에 그런 그림들을 그렸던 것일까? 아니면 한 시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염려하며 돈키호테처럼 세상을 바꾸고자 하던 모험가였을까? 오늘 그것을 알아보고자 한다.


스페인 여행은 과거 ‘돈키호테’에 의해 이루어졌다. 1605년의 1권과 1615년의 2권을 통해 스페인 전역을 다루던 세르반테스의 역작은 스페인의 낭만과 멋스러움 그러면서도 삭막함과 공허함의 절묘한 대칭을 통해 인생의 단면을 들여다보는 훌륭함을 드러냈다. 그 책의 내용을 따라 스페인 전역을 여행하는 즐거움이 있었고 지금도 스페인 전역의 장소에 산티아고로 가는 길처럼 돈키호테(Don Quijote)의 흔적이 남은 곳이 남아 있다.


화가의 화려한 꿈을 꾸며, 돈키호테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을 한 소년 ‘프란시스코 데 고야’는 화가로서의 삶을 13세부터 시작했다고 그의 아들 하비에르(javier)가 남긴 글에 의해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평범함 그림을 그렸던 피카소나, 달리처럼 빛을 보지 못하고 주변의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고야는 마드리드로 와서도 궁중에서 테피스트리(양탄자)의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으로서의 존재감 외에는 특별히 드러난 것이 없었다. 카를로스 3세 때부터 활동을 해 왔지만, 정말 특이점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그에게 알론소 키아노가 아닌 돈키호테의 삶으로 새로운 여정을 걸었던 것처럼 1777년 자신의 유일한 스승이라며 이야기하던 자연과 렘브란트와 벨라스케스의 그림 속에서 길을 찾기 시작한다. 특히, 벨라스케스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자신의 삶의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림을 완성하게 된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로 인해 왕실 명예회원으로서 당당하게 화가로서의 활동을 이루게 되고, 카를로스 4세 시절 왕실의 그림을 그려가며 거장으로서의 붓터치와 화려한 붓놀림의 향연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고야는 흔들리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내가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전해야 하는가? 였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고야의 유령]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고야가 자신의 귀가 더 이상 들리지 않자 갈등하던 그 순간 기대하던 프랑스는 고야의 기대감을 배신하고 잔혹함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신은 나에게 사람의 소리를 듣지 말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게 하기 위해 내 귀를 들리지 않게 했다.”라는 말을 하며 그 상황을 그대로 남기는 것을 보게 된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돈키호테를 통해, 그리고 프란스시코 데 고야의 그림을 통해 느끼는 것은 공감과 동질감이다. 많은 이들이 고야는 나폴레옹을 추종했다. 그리고 상황이 바뀌니 페르난도 7세를 추종했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와 반대다. 사실 나폴레옹을 좋아했던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당시 프랑스는 계몽주의가 일어나고 있었고 변화의 시기를 겪고 있었고 그것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스페인은 여전히 군주제의 허망함만이 가득했고 그 무능함으로 인해 수많은 국민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나폴레옹이 이끄는 계몽주의를 선택했었다. 그런 그에게 현실의 나폴레옹은 더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그 잔혹함 앞에 결국 프랑스에게 등을 돌렸지만 1819년 프랑스에게서 벗어난 스페인의 페르난도 7세는 더 잔인했기에 고야는 그 어느 곳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고야는 오직 한 가지 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람의 삶은 아름답다.”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의 스케치나 궁중화가로 활동하면서 초기까지의 그림을 프라도 미술관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너무나 따스해진다. 그냥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해맑아 진 입가의 미소가 그려짐을 보게 된다. 그런데 현실의 고통이 보이며 국민들의 아픔이 보이는 그 순간 그의 그림은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그의 그림은 잘못가고 있는 정치와 사회를 향한 다양한 풍자와 해학과 고발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였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왕비 마리아 루이사 드 팔마를 중앙에 그리며 카를로스의 무능을 비꼬았고, 드 팔마 여왕의 화려한 남성편력을 비꼬듯 어린 공주의 머리에 있는 큐피트의 화살(주 : 이 큐피트의 화살은 결혼할 정년기가 되었음을 알리는 공주의 표식이었다)을 왕비의 머리에 꽃는 모습 그리고 백성들을 속이기 위해 검소한 척 기마상을 그렸지만 그 쓴 모자의 꽃 한송이로 ‘나는 사치스러운 여인이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하는 모습을 본다. 그래서 고야의 유령에서 뒤돌아 가던 드 팔마의 모습이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매치가 되어 웃음이 난다. 사실 젊은 모습으로 그려지기를 원하고 꾸며지고 가려진 화려함을 원했지만 고야는 현실을 그려낸 화가였다.


그래서였을까? 서양미술사의 대가로 불려지는 곰브리치의 글이 귀에 남는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진 자와 힘 앞에 굴복하지 않은 자 그는 오직 프란시스코 데 고야였다.”라는 이 말 말이다. 내가 프라도 미술관 1, 2, 3층에서 만난 고야의 모습은 그랬다. 알론소 키아노가 당시 허영과 가식에 사로잡힌 꾸며진 기사의 모습에 도전장을 내밀고 진실한 기사도의 정신을 찾아 나섰던 그 여정을 고야가 그대로 그 삶 속에 보여주려 노력했음을 보게 된다. 알론소 키아노처럼 주변의 인식을 꺽지 못하고 결국 쓸쓸이 자신의 방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맞이했던 돈키호테처럼 왕실을 떠나 인간의 깊은 고뇌와 갈등의 원초적 출발이 무엇인가를 갈등하던 고야는 ‘퀸타 델 소르도(귀머거리의 집)’에서 14편의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불의함과 억울함 속에서 갈등하며 부딪쳐 무모하게 풍차를 향해 용으로 인식하고 달려들었던 키아노처럼, 왕실의 허영을 그림으로 깨우치려 했던 고야처럼 우리 역시 이 시대의 돈키호테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그 길은 멈추지 말자. 꿈마저 사라져버린다면 그 발걸음은 정말 너무 허무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그래서 알론소 키아노도 돈키호테로 삶을 마무리했고, 프란시스코 데 고야도 그 삶을 돈키호테로 마무리 지은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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