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위함과 수용의 위험을 보여준 돈키호테

스페인 사계절 산책하기

by jairo


4. 위함과 수용의 위험을 보여준 돈키호테


제목이 재미나지 않는가? 위엄고 아니고 위용도 아니고 위험이라 글을 남겼다.


위함은 곧 배려이고, 수용은 받아들임의 배려인데, 이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은 주체자가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주인공은 내가 되지만, 결국 타인의 삶에 관여함으로 벌어지는 내 삶의 이야기가 곤경에 처할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선입견과 편견으로 점철된 자신의 시선으로 타인을 조율하려 들거나 재단까지 하고 있다. 자신이 세상의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위함과 수용은 순수함의 의미보다 마치 베풀어주는 관용인냥 보여지는 오만함이 그 정점을 이룬다.


상하의 관계성에 길들여진 이유랄까? 나보다 나은 모든 환경에 박수를 보내기보다는 시기를 먼저 띄우게 된다. 그

모든 사실은 진실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에서 다 드러난다.


이 모든 것을 꼬집고 있는 책이 바로 알론소 키아노가 주인공인 돈 키호테이다.


허풍과 허영이 가득하고 전쟁과 기근 그리고 전염병으로 죽어가는 상반된 상황의 아이러니가 펼쳐진 1600대의 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듯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은 세르반테스의 이 해학적 삶의 깊은 내면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따르고 있음을 본다.


결국, 세상은 변한 듯 하지만 그 근원의 뿌리는 늘 제자리라는 이야기 같이 들린다.


돈 키호태를 늘 풍차에 달려드는 미치광이 광인으로만 오해하고 살아왔다. 철학적이고, 심리학적이고, 논리적이며, 언어학적인 이 알론소 키아노를 단지 로시란테를 타고 풍차 인판타에 달려 들었다가 나가 떨어진 이야기 외에는 우리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 마치 ‘광녀 후아나’처람 말이다.


우리는 왜 이렇게 왜곡을 시켜 독자들로 하여금 보이는 사실 그대로를 마음에 담고 이해하고 정리하도록 돕지 않는걸까?


수많은 세기 정치에 이용당한 우리의 마음은 똑바로를 보고 듣는 걸 잃어버렸다. 드라마에서 보여지며 세뇌되어지는 말도 안되는 상황을 당연시하는 문화에 빠져들고, 얼마나 잔인해져야 두려울까? 하는 테스트를 하는 것인지 이제는 왠만한 장면에 눈 하나 꿈쩍이지도 않는다. 생명이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도 무심히 바라본다. 무감각하고 무정하게 말이다.


왜 이렇게 위선적일까? 산초와 신부를 중심으로 한 친구들의 위함이 결국 알론소 키아노 스스로 희망과 미래에 대해 무대의 막을 내리게 했으니 말이다.


친구들의 마음을 알기에, 이유나 토를 달지 않고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은 채 숨을 거둔 것도 솔직히는 마음에 안 든다.


삶은 정말 왜 이럴까?의 탄식과 울분이 돈 키호테를 바라보면 회한의 눈물로 두 빰을 적시고 만다.


알면서도 본이 되어야 하고, 수용하고 받아들임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아름다움 뒤에 밀려오는 내 내면의 쓸쓸한 발걸음이 밀려오는 짙은 안개처럼 나를 덮어 온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