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림크림쌤 Nov 13. 2024

희망과 절망 사이, 그 사이에 현실이 있다

사실은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나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풍이 지는 속도가 다른 은행나무들을 보며 해마다 하는 과학교사스러운 나의 생각.


해마다 가을이 되면 집 앞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은행나무들이 이렇게 노랗게 단풍이 드는데, 두 줄로 줄지어 심어져 있는 이 은행나무들을 보면 과학교사인 나에게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안겨준다.


'분명 바로 옆에 있는 저 은행나무 두 그루는 토양 상태, 강수량, 일조량 등 환경조건이 거의 같을 텐데도 저렇게 단풍이 드는 속도가 확연한 차이가 나는구나.'라는 생각 말이다.


나란히 있어 후천적으로 제공되는 환경조건이 동일한데도 불구하고, 샛노랗게 한가득 단풍이 든 은행나무와 아직 단풍이 시작되지도 않아 새파란 은행나무...





사실은 나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인 나는 티라노가 태어난 순간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무언가 달랐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티라노의 느리고 예민한 발달이 내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잘못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타고나길 기질이 매우 예민하고 느린 아이라는 것.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내가 하필 과학교사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 탓인 이유를 과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게 문제다.


문제는 내가 과학을 잘 아는 과학교사라서, 다소 결정론자에 해당한다는 게 문제라면 정말 큰 문제다.

내가 가진 유전자의 절반과 내가 사랑하는 남편이 가진 유전자의 절반이 합쳐져 나의 티라노씨에게 전달이 되었고, 엄마 아빠에게 받은 유전자들이 우열의 원리에 의해 경합을 벌여 티라노에게 이긴 유전자로 표현된다는 것.


사실은 내가 '티라노에게 이 유전자를 물려주어야지!'라고 원하는 유전자를 물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건 인간인 부모의 영역이 아닌 신의 영역이라는 것.

따라서 부모가 물려주길 원하지 않는 질병이나 예민한 성격 유전자 따위가 자녀에게 대물림될 수 있고, 이건 부모가 선택 가능한 영역이 아니기에 부모 잘못이 절대 아니라는 것.


그러나 어쨌든 나의 티라노씨를 괴롭히는 ADHD유전자는 내 의도와 전혀 상관없이 엄마인 나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엄마인 나는 ADHD유전자만은 나의 티라노씨에게 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지만 신의 선택에 의해 티라노씨에게 대물림되었고, 심지어 아빠의 유전자를 이겨버리고 ADHD로 표현되었다는 점.





난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동일한 환경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빠른 발달과 느린 발달을 보여주는 나란한 두 은행나무.

은행나무를 심던 사람은 그냥 여러 개의 모종 중 아무거나 골라 심었고, 이 나무가 발달이 유독 느린 은행날무라는 걸 심는 사람은 미처 알지 못했겠지..


그러나 나와 은행나무를 심던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그 모종은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게 아니지만, 티라노가 가진 ADHD 유전자는 내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어쨌거나 엄마인 나에게서 갔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 티라노가 ADHD가 없는 다른 엄마를 만났다면 남들과 섞여 있는 순간에도 보다 편안한 대화도 가능하고, 애쓰지 않아도 보다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 않았을까...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티라노가 다른 엄마를 만났다면 그건 티라노가 아니고 다른 아이지.

과학교사가 논리에 안 맞는 비과학적인 희망을 가득 담은 말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희망과 절망 사이.

그 사이에는 현실이 있다.





사실 정말로 내가 아는 것.

사실은 돌이켜보건대 내가 ADHD여서 오히려 수십대 일 과학과 임용고시 패스를 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ADHD여서 늘 성과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좋았다는 것.

단지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을 때 늘 엄청나게 애를 써야 평범해 보여 인생이 피곤해서 그렇지...

내가 ADHD여서 사실은 엄청난 잠재력과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어찌 보면 엄청난 유전자가 나의 티라노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그 아이도 원하고 좋아하는 분야에서는 엄청난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

그렇지만 나의 티라노만은 성과가 높지 않은 사람이어도 좋으니 부디 피곤하고 애쓰는 인생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었으면 했다는 점.





사실은 오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건가 보다.


'그림크림! 너 잘하고 있어!

티라노는 너가 아니고 티라노는 너와 달라! 제발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너처럼 힘들게 살지 않을 아이야...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미안해해도 괜찮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