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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크림쌤 Nov 20. 2024

사춘기 자녀와 거리두기 vs 루틴형성의 팽팽한 줄다리기

사춘기 자녀와의 거리두기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많은 전문가들은 자녀가 사춘기가 되어 부모의 통제가 잘 통하지 않기 시작하면 보통은 사춘기 자녀와 거리두기가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사춘기 자녀와 부모 사이에 필요한 거리는 어떤 거리를 말하는 걸까...



어제저녁 내내 티라노만 홀로 집에 있게 되었다.

어제 친하게 지냈던 대학 때 선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고 문자를 받아 남편과 함께 장례식장에 가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

혹시나 예전처럼 "그래~!"라고 할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확률에 또 한번 기대를 해보는 나는 이번에도 티라노에게 물어본다.

"아들~ 엄마 OO삼촌 아버지 돌아가셔서 아빠랑 가야 되는데 같이 갈래?"라고..

사춘기인 데다 극 I인 티라노는 이번에도 역시나 "아니."라고 대답하며 희박한 확률은 역시나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낮음을 증명해준다.



예민하고 여린 아들의 마음읽기를 하느라 바쁜, 눈치 없는 엄마가 나다.

타고나길 눈치가 없어 고지능을 눈치 보는데 다 쓰며 사는 나는 장례식장에 가야 함을 티라노에게 통보하는 순간에도 "아니."라고 말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 몇 초인지, 그리고 대답을 그렇게 하는 의미는 무엇인지, 말하는 순간까지의 아들의 눈꼬리, 입모양과 같은 표정변화, 미세한 기분 변화를 살피느라 내 머릿속이 분주해진다.

어째 "아니."라고 말을 하면서도 무언가 홀로 집에 남겨지는 것이 썩 좋아하는 느낌은 아니라 마음 한편이 조금 찜찜해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젯밤에 티라노가 보드게임 하자고 했을 때 늦어서 피곤하니까 내일 하자며 거절하지 말고 할걸... 티라노 마음 어루만져 주려면 분명 오늘 즈음엔 가족끼리 함께 시간을 보내야 티라노의 마음이 풀리는데 이를 어쩌나...'라는 작은 후회가 잔잔하게 밀려온다.




그렇게 장례식 장에 다녀온 우리는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귀가했다.

"아들 너무 늦었지... 생각보다 선배들이 많이 와서 오랜만에 얘기하느라 좀 늦었어... 늦어서 미안.."이라며 애교와 핑계 한 스푼을 섞어 사과도 해본다.

늦었으니까 이제 자자는 우리를 보더니 갑자기 티라노가 벌떡 일어나며 오늘 분량의 수학 숙제를 못해서 지금 해야 한다고 말하며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책상에 앉아 새로 들어간 수학학원의 숙제를 편다.


'새로 들어간 수학학원이 꽤나 마음에 들기는 하나 보네...'

'저 예민한 아이가 새 학원과 성향이 잘 맞아서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채근하는 엄마가 없으니 오늘 분량의 수학 숙제를 이 시간까지 안 하고 결국 미루었었구나...'

'집을 비우지 말고 옆에 있었어야 하는 거였는데... 내가 집에 있었으면 분명 지금보다는 더 빨리 숙제를 시작했을 텐데...'

'그래도 잔소리 한번 안 했는데도 스스로 숙제를 먼저 시작하다니 정말 많이 좋아졌다..'

여러 가지 마음이 마구 뒤섞여 또 내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생각이 많아지기 시작한다.


아침이 되어 티라노에게 다시 한번 사과를 해본다.

"티라노야.. 어제 엄마 아빠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했어... 엄마 아빠 왜 안 오나 기다렸어?"라는 나의 물음에 평소처럼 '뭐래~ 기다리긴 뭘 기다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른, "알면 됐어~"라는 의외의 희박한 확률의 대답이 돌아온다. 어라... 이번엔 희박한 확률이 이기기도 하는 그런 날이다.


올 때 삼겹살을 사 오겠다고 약속하며 나가놓고 우리는 먼저 가보아야 한다는 거절의 한마디를 하지 못해 결국 붙잡혀 있다 새벽 늦게까지 있게 되었고, 영문도 모른 채 삼겹살은 커녕 집에 오지도 않는 엄마아빠를 은근히 기다렸을 티라노씨를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아려오며 조금은 속이 상한다.


'두어시간 있으면 충분히 예의는 갖추었으니 우리 먼저 가겠다고 하고 왔어도 되었잖아.... 그림크림, 이렇게 후회할 것을 넌 왜 항상 거절을 못하고 남에게 끌려다니기만 하니.. 무엇이 중요한데... 어?!!'

이 생각으로 온 종일 머릿 속이 다시 한번 가득 차 복잡해져 내 머릿 속은 여전히 조용히 바쁘다.




내가 곧 고등학생이 되는 다 큰 티라노를 고작 하루 방치했다고 자책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모든 아이들에게도 루틴 형성이 매우 중요지만 특히나 할 일을 최대한 끝까지 미루는 ADHD아이들은 더더욱 할 일을 제때 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매일매일 정해진 같은 시간에 이를 반복해서 습관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루틴 형성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어리석게도 티라노가 사춘기가 터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ADHD아이들에게 사소한 한 가지의 일에 대한 루틴을 완성하려면 일반 아이들에 비하여 정말 몇 배의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할 일에 대한 루틴을 전부 완성하려면 몇 년 이상의 시간과 엄청난 보호자의 끊임없는 인내와 노력이 요구된다는 사실도 이제야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가 별일 아닌 하루 늦은 걸로 이렇게 자책하는 이유는 루틴형성이 시급하고 그 무엇보다 중요한 티라노에게 어제 보호자인 내가 거절하지 못하고 붙들려 있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한창 노력 중이던 수학숙제 루틴이 깨졌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루의 할 일을 미루지 않고
정해진 시간과 정해진 순서대로 해서
예측가능한 하루를 살게 만드는 것.



이게 바로 ADHD자녀를 둔 내가 반드시 티라노가 성인이 되기 전에 완성해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할 일을 자꾸만 최대한 미루면서도 할 일을 하지 않고 있어 늘 불안감을 느끼며 자책하기를 반복하며 살다가 결국에는 '난 한심하고 무능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도달하며 자존감이 점점 내려가는 인생을 사는 ADHD.

그런 우리들에게는 할 일이 습관이 될 때까지 계속 반복해 주어 예측가능한 하루를 살게 만들어주는 것바로 자존감 향상과 연결되기 때문에 루틴형성이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습관이 몸에 배이도록 길들이는 것은 마치 기울기의 급해짐이 갈수록 심해지는 2차 함수처럼, 단 하루라도 거르면 하루가 더 걸리는 것이 아닌 몇 배로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 또한 내가 잘 알기 때문이다.


x축은 루틴형성을 거른 시간, y축은 루틴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





즉, ADHD자녀의 루틴형성을 거른 시간이 길어질수록 길어지면 한 가지의 루틴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시간과 노력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더욱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게 된다는 거다.


왜냐하면 루틴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일은 씻기, 정리하기, 공부하기와 같이 하기 싫고 재미없는 일 투성이고, 그 일을 하루라도 걸러 안 하는 편안한 경험을 맛보게 되면 ADHD아이들의 도파민이 터져 더욱더 하기 싫은 마음 상태로 금세 되돌아가버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까지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춘기 자녀와 마음의 거리 두기를 해서는 안된다.


사춘기 자녀를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며 부모 통제하에 두는 것보다는 스스로 할 일을 해낼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유도하여 자율성과 회복탄력성을 기를 수 있도록 부모가 도와주어야 성인이 되어 부모 없이도 홀로 서서 힘든 상황을 스스로 극복해 내는 힘이 생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게 바로 사춘기 자녀와 거리 두기다.

사춘기 자녀와 거리를 두라는 건 사춘기 자녀를 육체적, 정신적으로 통제하지 말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라는 의미이지, 사춘기 자녀의 마음 읽기를 중단하고 홀로 내버려두라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반드시 갈 수밖에 없었던 장례식장에 가서 끌려가듯 늦은 시간까지 붙잡혀 있다가 온 일 한 가지로 인해 사춘기 자녀와의 거리 두기의 의미와 ADHD자녀의 마음 읽기, 그리고 루틴형성의 중요성까지 생각이 퍼져나가 이를 2차 함수 그래프까지 그려가며 강조하고 있다.


장례식장에 대한 생각이 다른 생각을 낳고 또 다른 생각으로 곧바로 이어지고...

이 생각들이 머릿 속을 떠나지 않은 채 가득차 늘 복잡하고 시끄러운 머릿 속을 가진, ADHD를 끌어안고 한 평생 살고 있는 과학교사이자 티라노의 엄마다. 그래. 난 이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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