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는 마리아주가 중요해요
와인을 좋아하기 시작한 이후에 가장 큰 기쁨은 좋아하는 와인과 잘 맞는 음식을 마주할 때이다. 가끔 엉뚱한 마리아주가 나 홀로 입맛에 맞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와인 전문가나 고수들의 조언이 정답일 경우가 많다. 가끔씩 “샤블리에는 굴”이라는 공식을 외치는 소리를 종종 듣게 되는데 정말 그 말은 백 퍼센트 공감이다.
또한 “네비올로에는 양고기야”라는 말도 듣게 되는데, 사실 이 말의 진의를 체험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양고기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것은 양고기 냄새에 대한 편견 때문이 아니라 어린 시절 가졌던 양- 먹어서는 안 되는 예쁜 동물-에 대한 친근감 때문이랄까? 그렇지만 소, 돼지, 닭을 잘 먹는 내가 양고기는 안 먹는다고 말하는 것이 모순이라고 핀잔을 들을 수 있겠다 싶어서 네비올로(와인 품종)와 양고기를 시도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날을 잡고 생양갈비를 주문하고 가져간 바롤로(Barolo) 와인을 오픈했다. 화로 위에 올라간 선홍빛의 양갈비가 아주 신선해 보였다. 두툼한 양갈비가 익어가는 시간 동안 나는 주책처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양고기가 호주산이라는데, 저 양은 죽기 전까지 초원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다 죽을 때 고통 없이 갔을까?’
안 먹던 고기를 먹어야 할 때는 그 이유의 적절성을 찾는 법이다. ‘그래. 화로에 잘 구워지고 있는 이 양은 엠마의 돼지처럼 행복하게 살다가 갔을 거야.’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하겠다. 갑자기 내 의식이 시간여행을 좀 하는 탓에... 잠깐 영화 <행복한 엠마, 행복한 돼지 그리고 남자>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기 때문에 내 기억에 선하게 남아있다. 첫 장면에서 여자 주인공 엠마는 들판에서 돼지들과 뛰어다닌다. 자유롭게 노는 돼지가 엠마의 품에 안겨 가장 행복해하는 순간, 엠마는 숨겨둔 칼을 들어 쥐도 새도 모르게 돼지 목을 긋는다. 왠지 섬뜩할 것 같지만 이게 엠마가 생존을 위해 도축해야만 하는 돼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의 행위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최소화시키는 것 말이다.
물론 돼지 죽음이 이 영화의 주 얘기는 아니다. 이야기는 엠마가 시한부 인생을 사는 남편을 결국 그녀의 돼지처럼 조용히 고통 없이 숨을 거두게 해주는 것으로 마감한다. 하지만 이러한 죽음에 대한 시각이 비극으로 와 닿기보다는 마치 삶의 유머가 닮긴 희극 같은 느낌이 들게 해 준다. 멋진 대사도 기억에 난다. “정말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라는.
영화를 보는 내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가느니 엠마의 품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에 삶을 마감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 대상이 돼지이든 사람이든 말이다. 특히 돼지를 죽이는 장면이 나에게는 아주 강렬하게 다가왔다. 육식을 하는 나로서는 고통 없이 돼지를 죽인 엠마가 고맙게 느껴지게 까지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든 동물들이 엠마의 돼지일 수는 없을 터이니 안타까움 또한 느껴졌다.
한편, 뜬금없지만 육식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들어 주는 영화로는 <템플 그랜딘>도 있다. 영화 <템플 그랜딘>은 도축장에 들어가는 순간에 소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자폐증 천재 과학자 그랜딘의 눈을 통해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영화는 소가 느끼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장 최소화시킬 수 있는 도축장을 설계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다룬 실화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본 직후 얼마 동안은 도축되는 소가 눈에 밟혀서 소고기를 멀리 한 경험도 있다.
아무튼 의식의 흐름을 타고 영화 두 편을 훑어 보았으니 다시 화로 위의 양갈비로 돌아와야 할 시간이다. 나의 심리적 안정을 위해 ‘엠마의 양’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던 고기가 다 익어갈 무렵 고기를 구워주시던 매니저 분이 드디어 내 접시에 양갈비 한 점을 올려주었다. 그래서 일단 침 꼴깍 먼저 삼키고 고기 한 점을 집었다. 그리곤 청양고추 잔뜩 들어간 간장 소스에 푹 빠뜨린 후 매운 청 고추를 휘감아서 입안으로 재빨리 넣었다.
과연 맛은 어땠을까? 나는 솔직히 양고기 맛을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입안에서 간장 맛이 빠지고 양고기의 육즙 맛이 올라올 무렵 바롤로로 입안을 가글 하듯이 양고기를 같이 삼켜버렸다. 사실 바롤로를 맛있게 먹기 위해 양고기를 선택한 것인데 마치 양고기를 먹기 위해 바롤로를 선택한 것처럼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연출되어버린 것이다. 양고기를 삼키기 위해 바롤로가 필요했을 뿐인 것처럼.
그런데 두 점, 세 점 양고기가 익숙해질 무렵, 바롤로는 바롤로대로 양고기는 양고기대로 자기 맛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제야 와인 잔에 피어오르는 바롤로 향이 내 코로 들어오고 있다. 숯불에 구워지는 강한 양고기 냄새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래서 양고기에 강한 향을 지닌 바롤로가 좋다고 찾는 것일까? 만약 여기에 부드럽고 섬세한 피노 누아(Pinot Noir) 품종을 마셨더라면 피노 누아가 강한 숯불 향기와 맛을 감당해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네비올로 품종인 바롤로가 강한 남자의 와인으로 표현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듯하다. 와인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지만 바롤로가 나를 양고기의 두려움에서 구원 해준 든든한 와인이 맞는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양고기와 함께 자주 음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 친숙하지 않은 양고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와인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양고기와 친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그리고 솔직히 아직은 부드러운 피노누아가 더 좋다. 아마 바롤로 그대는 가까이하기엔 좀 센 터프가이로 기억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언젠가는 내게 다정했던 연인처럼 다시 다가가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사람 마음이 간사한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