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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림자 Aug 19. 2021

산책이 아름다운 이유

혼자 말고 같이 해요

오랜만에 남산으로 향했다. 오후 늦게 내린 소나기 탓인지, 제법 시원해진 바람이 창문 틈으로 불어왔고 코끝에 닿은 바람의 온도와 청량감에 끌려 나도 몰래 주섬주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집을 나선 것이다. 목적지는 늘 자주 가는 남산이다. 며칠 전만 해도 남산 산책은 꿈도 못 꾸었다. 끈적이는 습기와 온도 탓에 감히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작렬했던 여름의 열기는 입추가 지나면 어느 정도 꺾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있고 조금만 인내하면 기다리던 가을이 오고 있으니 그 밉던 여름도 참아 낼만 한 것 같다.
간간히 불어주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남산 공원을 지나 남산 순환산책로에 들어섰다. 저녁 7시를 갓 넘긴 시간이었지만 환한 대 낮처럼 밝게 느껴졌다. 이른 저녁을 먹고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소수도 아닌, 시원한 바람을 가르면서 걷기에 서로 피해를 주지 않을 정도만큼 산책로에 사람들이 있었다. 살에 스치는 바람의 촉감이 너무 좋아서 이런 느낌을 공유할 것 같은 옆 사람에게 말이라도 건네고 싶은 심정이었다.


‘날씨가 너무 좋죠? 바람이 너무 좋네요.’


물론 마스크를 쓴 탓에 서로의 표정은 읽지 못했지만 분명히 나와 같은 생각으로 걷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남산 순환 산책로에서는 걷는 사람 들 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달리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요즘 들어 남산을 걷다 보면 예전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를 하는 것 같다. 한 때 나도 달리기를 해볼까 생각한 적도 있지만 폐활량이 약한 나에게 달리기는 욕심 같았고 그저 빨리 걷기로 만족하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빨리 걷는 들 천천히 달리는 사람을 따라갈 수는 없는 법이다. 가끔 뒤에서 멀리 들리는 호흡과 발걸음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두세 명의 달리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을라치면 어느새 순간 나를 순식간에 제치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다. 그렇게 호흡이 맞게 달리는 그룹의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같이 달리고 싶어 진다.


산책로를 출발해 2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나름 빨리 걷는 나를 제치고 달리는 남자분이 눈에 들어왔다. 나이는 거의 80이 다 되어 보이는 마른 체구의 남자였다.(노인이라고 말하기에는 달리기 실력이 노인 같지 않아서...) 약간의 언덕길이라 그런지 달리기가 힘차 보이지는 않았지만 자기 페이스대로 천천히 달리고 계셨다. 그런데 저 멀리 뒤에서 두세 명의 호흡이 딱 딱 맞게 달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역시나 몇십 초도 안돼서 옆을 보니 세 명의 달리는 사람들이 나를 제치고 달려가고 있었다. 그 들 중 한 명이 그 나이 든 분에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 아마도 서로 알고 있는 사람들인 것 같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뒤에서 달리던 세 사람 틈에 그 나이 드신 분이 합류하자마자 그분의 발걸음이 갑자기 경쾌해지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곤 원래 그 그룹의 일원이었던 마냥 그들의 호흡과 속도에 맞춰 달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분은 오랫동안 달리기를 했었고 젊은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만큼의 경험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보기에 그분은 혼자 달릴 때 보다 그룹 속에서 달릴 때가 훨씬 생기가 넘쳐 보였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종종 혼자 걸을 때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혼자’ 임을 강조했던 말 들이 행여 누군가 옆에 없다는 결핍을 숨기는 심적 허영이 아니었는지... 혼자가 좋은 건 공통된 집합체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그 순간이지 늘 혼자라면 그건 그냥 외로움이 아닐까 싶었다. 젊은 사람들 틈에 끼어 뒤처짐 없이 달리는 그분의 뒤 모습이 멋있어 보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싶었다. 서로를 응원하며 같이 해낼 수 있는 능력과 열정을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생이 마라톤이라면 혼자 달리는 구간도 있지만 힘들고 쳐질 때 같이 달려줄 누군가가 있다면 힘이 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누군가가 내게 왔을 때 서로 등 떠밀어 주고 같이 달릴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느냐이다. 나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이다. 만약 그런 능력과 열정이 내게 있다면 나의 남은 삶의 행진도 누구의 발걸음만큼이나 경쾌해질 것 같다.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하는 산책은 

혼자 보다는 같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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