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거 때마다 가족에게 누구 뽑을 건지를 집요하게 묻곤 했다. 내심 내가 뽑을 후보와 일치하기를 바랐다. 만약 생각이 다르면 바꾸기를 종용(?)했다. 꽤나 적극적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 총선 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일단 나조차도 내가 지지한 후보에 자신이 없었다. 당선 가능성도 그랬고 딱히 내가 뽑을 후보자가 만족스럽지도 않았다. 다만 언론에서 흔히 말하는 ‘정권 심판론’에 기대어 그나마 당선 가능성이 있는 후보자를 선택했을 뿐이다.
아빠는 총선 개표 방송 막바지에 누굴 뽑았는지 넌지시 말했다. 결국 당신이 뽑은 사람이 됐다고. ‘결국에는 민주당에 투표하셨구나’ 예측 못한 건 아니었다. 여느 가정의 아버지들처럼 아빠는 TV 시청의 대부분을 뉴스 시청(특정 채널을 선호하진 않았다)에 할애했다. 시사나 정치 이슈에 친숙했다. 가족 식사 때도 나에게 정치 이슈와 관련해 궁금한 점을 묻곤 했다. 그러면 나는 사실을 기반으로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여 설명했다. 조국은 잘못했다, 공수처 도입엔 회의적이다, 정부 정책에 문제가 많다는 식의 주장에 나름의 주관을 강조해서 말했다.
그럼에도 아빠는 통합당(자유한국당)에 대한 반감이 컸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는 맹목적인 보수정당을 향한 반감의 분위기가 맴돌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한나라당 XXX”라는 말을 익히 들어온 터였다. 나는 이 반감에 반감을 가지면서 컸다. 아빠에게 현 정부와 여당의 잘못된 점을 더 부각해 노골적으로 얘기한 이유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러나 아빠는 민주당에 투표했다. 집안 분위기나 출신 배경과 무관했다. 나의 ‘반감에 반감’을 향한 반감은 더욱 아니었다.
아빠는 황교안을 유독 싫어했다. 뉴스에서 많이 나오다시피 한 그의 막말 논란에 치를 떨었다. 정치인의 막말은 여야 막론하고 늘 있던 이슈다. 그러나 그의 막말은 어떠한 지속가능함(?)이 있었던 것 같다. 틈틈이 꾸준했다. 그의 변명대로 (그를 향한) ‘막말 지적’은 하나의 프레임이 될 정도였다. 아빠는 통합당의 이미지를 황교안의 막말과 결부 지어 일치시켰던 것 같다. 황교안의 막말 논란은 통합당의 정치적 실책과 무능함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황교안에 대한 나의 감정은 양가적이다. 그가 당대표가 됐을 때 통합당에 기대를 저버렸다. 소설가 이문열은 탄핵 정국이 한창일 때 보수 정당을 향해 “죽어라, 죽기 전에”라고 일갈했다. 이미 쇠퇴한 만큼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먼저 죽어 거듭나라는 뜻이었다. 죽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온 이가 당대표가 됐다. 이 정당은 탄핵 전과 다를 바 없겠구나 생각했다. 동시에 나는 현 정부와 여당의 많은 정책 노선에 반대했고, 독주를 막기 위한 견제가 절실하다 생각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 역할은 통합당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차악을 선택한 것이다.
아빠는 매일같이 뉴스를 통해 전 세계의 코로나 확진자 수를 체크했다. 해외 정상들이 한국의 코로나 방역 대응에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 “그래 이 정도면 잘 버텼지”라고 말했다. 그리고 뉴스에선 야당 후보의 막말 논란이 거듭 보도됐다. 뉴스를 접한 아빠의 모습은 ‘그럼 그렇지’라는 눈치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아빠는 투표를 결심하기에 앞서 최선이라 믿었을까, 아니면 차악이라 생각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