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출생주의에 대한 고민
출산의 목적은 무엇일까. 먼저 아이를 위해 출산을 한다는 주장이 성립할 수 있을까? 아직 존재하지 않는 아이를 위해 출산을 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하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삶을 전제로 존재의 시작을 정당화할 수 없다. 예컨대 “아이의 인생을 위해 아이를 낳는다”는 식의 말은 성립할 수 없다(밥을 위해서 밥을 만들지 않는 것처럼). 물론 이런 식으로 출산의 목적을 말하는 부모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목적 없이 “생명 잉태는 자연의 질서요, 출산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적 욕구 실현이니, 순리에 따를 뿐”이라는 설명도 명쾌하진 않다. 논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종족 번식 욕구를 갖는다” 명제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앞의 사실에 부합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인간은 종족 번식을 해야 한다” 당위로 이어지진 않는다. 자연주의적 오류는 어떠한 사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토대로 그 사실을 정당화할 때 발생한다. 예를 들어 인간이 폭력적 본성을 가졌다는 사실을 토대로 인간의 폭력을 정당화할 수 없다. 물론 ‘본능에 충실할 것’ 자체로 목적이 될 수도 있겠다.
“계통발생적인 관점에서 출산하려는 충동은 극도로 원시적이다. 만일 '퇴행적인'이 '원시적인'으로 이해된다면, 출산하는 것이 퇴행적이다. 그리고 합리적인 동기를 가지고서 출산하지 않는 것은 진화적으로 더 최근 일이고 더 진보된 일이다”“ - 책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中 에서
출산의 목적은 아이(존재한 적이 없는) 이외의 존재(이미 존재하는)를 위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대개 부모는 자신의 자아실현이나 거기에서 오는 만족감을 동기로 출산을 선택하는 것 같다. 가족 형성이나 양육 등의 경험에서 오는 즐거움(?) 말이다. 지금처럼 저출산 문제가 심각한 사회적 위기 속에서 국가를 위해 몸소 출산을 실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목적의식은 결국 아이를 하나의 수단으로 인식하는 것과 같다. 나(부모) 또는 국가를 위해 아이를 낳는다. 이것은 나 또는 국가를 위해 밥을 만드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아이를 가짐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은 인질을 잡음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과 같을 수 있다. - 책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中 에서
한 생명의 존재를 수단으로 인식하는 데서 발생하는 윤리적 딜레마는 익히 알려져 있다. 유전자 복제 기술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문제가 대표적이다. 이미 존재하는 사람의 난치병 치료를 위해 한 생명을 존재하게 함으로써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것이 현실화된 영화나 책 속의 가상의 세계는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동일한 윤리적 문제를 갖는 출산에 대해서 관대하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서 발생하는 혼란의 근원은 여기에서 비롯한지도 모른다.
영화 <가버나움> 속 주인공 자인은 자신의 부모를 고소한다. 13살의 소년 자인이 감당하기에 현실은 너무 지독하고 절망적이다. 11살의 여동생은 강제 조혼당하고 임신으로 죽는다. 자인은 여동생을 임신시킨 자를 칼로 찌른다. 자인의 부모는 임신을 했다. 자인은 판사에게 부모의 출산을 막아달라고 요청한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자신과 같은 운명을 살아갈 아이에 대한 연민이 부모를 향한 증오로 이어진다.
반출생주의가 논하는 ‘(아이와) 출생 이전의 동의 부재’는 다소 나이브하지만 고민해 볼 지점은 있다. 우연히 던져진 이 세계에서 고통의 삶을 살아간다면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 존재한 적이 없으면 겪지 않았을 고통은 누구 때문에 생기는 것인가. 물론 살아가다 보면 존재한 적이 없으면 누릴 쾌락과 즐거움도 있다. 그런데 삶의 고통은 일정한 한계점을 넘어서면 좋음의 양이 얼마나 되건 그것을 능가할 수 없는 듯하다. 아주 극소수의 삶만이 예외에 속하지 않을까. 이러한 불확실성에 기대어 출산을 선택하는 부모의 결정은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
남아공 철학자 데이비드 베너타는 책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에서 도발적인 주장을 꺼낸다. 인간 존재의 해악성과 그 나쁨이 얼마나 큰지 논증한다. 결론은 낙태와 반출생주의 그리고 인류의 점진적 멸종으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