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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a Aug 20. 2021

일, 너란 녀석

나의 젊음과 함께한 일.


"Reina 너는 일 경력이 많아서 좋겠다."

친한 친구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내가 일하는 동안 네가 누렸던 캠퍼스 생활이 난 부러워.'



꿈과 같은 대학생활대신 얻은 일과 경력.

돈을 위해 시작했지만 이제는 자부심이 되었다.






일이란 내게 삶의 동아줄이었다.



고3 수능을 치르고 대학교에 너무 가고 싶었다. 열심히 그 시절을 불태웠지만 원하거나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정도의 성적은 아니었다. 내 공부만 신경쓰다 집을 돌아보니 엄마 혼자 빚에 허덕이며 지쳐가고 있었다. 도울 힘이 필요했다. 더욱이 동생들이 나와 같은 수순을 또 밟지 않길 바랐다. 그저 나 한 명 희생한다면 동생들은 조금 더 마음 편히 자신의 앞길을 열어갈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일을 해서 돈을 벌기로 했다. 고등학생 때까진 교사라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 꿈을 이루려면 대학에 가야만 했다. 결국 욕심을 내었다. 공부와 돈을 버는 것 둘 다 해야겠다고. 자잘한 아르바이트는 그나마 할 수 있었다. 한 달에 엄마한테 어느 정도의 돈을 드릴 수 있었고 하루를 길게 살았다. 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수단은 몇 시간짜리 아르바이트였고, 그것만으로 엄마에게 작은 보탬이 될 수 있어서 기뻤다.



온전히 공부만 하기에도 부족한데 고된 아르바이트 생활은 공부에 집중할 수 없게 했다. 학교다닐 때보다 못한 점수를 받고서 대학을 포기하기로 했다. 취업전선에 뛰어들기로 했다. 정보산업고를 다닌 것도 아닌 일반 인문계를 나온 고졸 스물한 살 짜리는 취업시장에서 매력이 없었다. 여기 저기 이력서를 넣어도 짤리기 일쑤. 방황하던 차에 마트 보안요원으로 10개월 가까이 일했다. 일 끝나면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며 동료들과 어울렸다. 당장 눈 앞의 지금만을 보고 초점없이 지내던 시절이 그 때였던 것 같다. 일은 철저히 돈을 위한 수단이었다.




일이란 성장이었다.




그 방황이 끝나게 된 건, 큰 아빠 회사에 막내경리로 취업하게 되면서다. 어느 날 큰 엄마에게 전화가 와서 큰 아빠 회사에서 일해보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셨다. 마침 회사에 직원도 필요했고, 가족이면 믿을만 하다 생각하셨던 것 같다. 회계의 ㅎ자도 모르던 내가 그저 일자리라고 하니 마음이 혹하여 이직을 결정했다.




어디에 가서 딱히 회계를 배울 곳도 없었다. 당시 토요일까지 근무를 했는데 2시에 일이 끝나면 큰 아빠는 나를 붙잡고 사무실에 앉아 회계를 가르치셨다. 적어둔 내용을 읽고 또 읽어봐도 한글인데 외계어처럼 보였다. 한 달 즈음 되었을까. 회계의 원리에 대해 눈을 떴다. 지금 어떤 상황을 맞이해도 당시 힘겹게 깨친 회계원리는 절대 잊혀지지 않는다.




별 기대없이 시작한 일은 회계에 대해 알게 되니 조금씩 탄력을 받았다. 욕심이라는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나보다 위의 경리 언니가 하는 업무가 궁금했고 배우고도 싶어졌다. 회계 전공으로 대학도 가고 싶어졌다. 집에 여전히 돈을 보태야 하기에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고, 큰 아빠께 부탁을 드려 퇴근을 조금 일찍하고 야간 대학에 다녔다. 몇 개월 간 하던 저녁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었고 수능공부로 시간을 채웠다. 대학을 다니며 더 넓은 회계를 만나고 나니 회계 전문성을 갖춘 사람이 되고 싶었다.




24살 하반기, 10여 년째 인연을 잇고 있는 지금 회사를 만났다. 마지막 학기 종강과 어느 정도 맞춰 새 회사에 입사를 하였고 좋은 상사분을 만나 일을 배워가는 재미에 빠졌다. 당시 해야할 일이 엄청 많았다. 처음 1년 정도는 1년 365일 중 300일은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출근했다. 힘들었지만 같이 일하는 사람이 좋아 일 힘든 게 생각나지 않았다. 더욱이 상사분은 내게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 작은 것 하나에도 호기심을 갖고 바라보길 바라셨다. 그 덕분에 나는 많이 성장할 수 있었다.




일은 삶의 질을 향상시켰다




회사를 다니던 도중 집에 돈을 보태지 않아도 되는 시기가 왔다.

엄마는 전세자금을 갚고 나는 집 공과금 정도만 내면 되었다. 어찌나 기쁘던지. 내로라하는 회사를 다니고 있지는 않았어도 엄마에게 힘이되고 내가 못 누리던 것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여행도 열심히 다녔고, 옷을 구입하는 가격대도 조금은 올릴 수 있었다. 지하상가에 만원하던 단화를 신으며 뒷꿈치가 다 까지는 경험에 매번 밴드를 들고다니기 일쑤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수제화브랜드에서 이십만원 돈을 주고 신발을 사 신었다. '구두를 신으면 발이 아프다' 는 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엄마는 어렸을 적부터 고생했다며 나를 안쓰러워 하신다. 나는 일을 통해 엄마에게 듬직한 동역자가 되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고생했지만 얻은 것이 내겐 더 많았다. 철도 더 빨리 깊게 들 수 있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일을 하면서 나의 욕심을 더 낼 수 있었고, 어디 가서도 직장인이라는 자부심을 내려 놓지 않게 되었다.







스무 살, 나의 꿈을 잠시 포기하면 되었다.


일의 시작은 집을 위해서였다. 가족이 느끼는 불안감을 채우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상황이 안정이 되니 일은 나를 성장하는데 집중시켰다. 직업의 고하를 불문하고 일이란 건 내 삶의 전반에 계속 함께하는 친구였고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 다시 고3 수험생이 되고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난 아마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물론 캠퍼스 생활에 젖어들고 싶은 아쉬움도 있긴 하다. 그래도 전공서적에서 배울 수 없는 인생의 진한 공부는 일을 통해서 했던 것 같다. 요즘 매너리즘에 빠져 일 그만두고 마냥 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나온 나의 시절과 계속 함께했던 일이라는 녀석을 돌아보니 아직은 조금 더 부비며 지내봐야겠다는 다짐이 일었다.

치열하게 살며 일이랑 보낸 나의 젊음은 과거가 아니고 현재진행형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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