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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Unknown Di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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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ina Aug 31. 2021

왜 나이들은 척하니?

척하는 줄 알았지만 나는 사실 나이든 게 맞다

어젠 주말에 다 못 본 예능프로그램을 하나 시청하고 11시쯤 평소보다 일찍 누웠다. 고요한 밤을 채워주는 달콤한 목소리를 찾고 싶었다.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라디오 채널에 간만에 접속했다.

밤 10시부터 12시까지 CBS 음악FM에 나오는 "허윤희의 꿈과 음악 사이에".



허윤희 DJ는 적당하게 차분한 목소리를 가졌고, 공기 반 소리 반으로 단아하고 우아하게 진행을 이어간다. 그녀에게 느껴지는 예쁜 척 0%의 담백함은 하루 일과에 지친 밤을 포근한 품처럼 달래주는 매력이 있다. CBS방송이니까 교회음악(CCM)을 듣는 거냐고? 아니다. 이 채널에선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까지의 가요가 나온다. 한 살 차이인 남편과 내가 가장 정신이 또렷했던 10-20대의 배경음악이 되어주던 그 시절 노래들이 흐른다.



사실 요즘 음악방송에 나오는 친구들 보면 다들 화려하게 멋지고 반짝반짝 예쁜 건 맞지만 노래에서 뭐라고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가사를 찾아보아야 '아, 저런 내용이었군'하며 이해하곤 한다. 추임새만 잔뜩 들어간 것 같고 가사의 스토리를 이해하기가 정말 힘들다. 정신없이 쿵딱이는 요즘 노래의 홍수 속 작은 틈사이로 과거의 노래들이 나오면 오랜만에 옛친구를 만난 듯 반가운 마음이 커진다. 남편과 라디오를 들으며 "역시 옛날 노래가 좋아."를 연신 외치며 따라 흥얼거리기도 했다.



노래를 듣다보면 나는 분명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데 노래가사의 주인공이었던 나의 시절을 돌이키면 10-20년 전이다. 불과 일, 이년 전처럼 가까이 느껴지던 그 시절이 훌쩍 점프를 한 느낌이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잠시 과거의 나를 소환하고 별빛 세상에 빠져들어간다. 노래에서 멈추지 않는다. 남편과 대화를 나누다 남편이 질문을 하나 던진다.


"여보, 우리 나중에 네덜란드 가서 살래?"

"아니야. 나는 한국말 쓰면서 살고 싶어."

"그럼 LA가서 살까?"

"..."



처음엔 LA도 미국 아니야? 이런 생각에서 한인타운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구나 이해한다. 그러고선 LA라는 소재로 의식의 흐름은 흘러간다. LA하니까 LA아리랑이라는 시트콤이 생각이 났나보다. 남편이 정찬우는 무얼 할까? 얘길한다. 분명 같은 사람이 머릿속 전구가 켜지며 떠올랐는데 뭔가 어색하다. 둘은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정찬우가 아니라 김찬우 배우였고 그는 LA아리랑이 아닌 순풍산부인과에 나왔다. 과거의 기억이 뒤섞여 20년 전에 무더기로 묶여있다보니 정리정돈이 안된다. 



LA아리랑에서 시작된 과거여행은 달려라코바, 알렉스키드, 이제니가 결혼을 했다 이혼을 했네, 이용범이 아니고 이영범이네까지. 자정이 넘도록 시끌시끌 수다를 떨며 보냈다. 분명 다른 지역에서 살았을 우리지만 같은 시대를 소환하면 대화소재는 끝날 줄을 몰랐다.


지금 세상은 너무나 풍족하고 빨라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모래시계 로딩시간처럼 답답한 건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옛시절의 풋풋하고 촌스러운 때를 떠올리면 느렸어도 무언가 불편했어도 그 만의 낭만이 있고 순간마다의 두근거림이 있다. 



과연 10-20년 후, 과거에 보았던 드라마 중 풀하우스와 펜트하우스 중에서 무엇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까.

성장하면서 나의 나이테에 새겨진 그 촘촘한 기억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이미 단단하게 굳어진 머리에 새기려 해도 고작 얹혀지는 나중의 기억보다는 더 깊을 수밖에. 그래서 현재보다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릴 때 몸이 저릿할 정도로 감정이 온몸을 휘감는 것 같다.



자꾸 "옛날"이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나이들지 않았다고 인정하고 싶지만 내가 떠올리는 시절은 이미 훌쩍 지나간 과거이다. 나이들은 척하고 싶지 않지만 척이 아님을 인정해야 할 듯 하다. 지금의 기억을 추억하기에 내 몸과 머리엔 이제 자리가 없으니 사진과 글로 남겨놓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도 어제도 기록한다, 나의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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