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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로 살아가기

너머의 삶이 아닌 '지금' 자신의 삶에서/ 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혼자의 삶"

캐럴라인 냅은 지적이고 유려한 회고록 성격의 에세이를 쓴 작가로, 2002년 마흔둘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냅은 살면서 몇몇 끔찍한 중독에 빠진 경험이 있는데, 삶의 불가사의한 두려움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을 땐 술로, 그런 자기 자신을 호되게 통제하고 싶을 땐 음식을 거부했다. 그는 이런 자신의 깊은 내면 이야기를 솔직하게, 우아하게, 또렷하게 고백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Drinking)》은 알코올 중독의 삶을, 《세상은 왜 날씬한 여자를 원하는가(Appetites)》는 다이어트 강박증과 섭식장애에 관한 기록이다. 개를 향한 지나친 애착이 염려스러울 정도로 개를 사랑하여 그 마음을 《남자보다 개가 더 좋아(Pack of Two)》라는 책에 담기도 했다.

《명랑한 은둔자》는 그의 유고 에세이집으로, 캐럴라인 냅이라는 작가의 삶 전반을 빼곡히 담고 있는 초상과 같은 책이다. 캐럴라인 냅은 삶의 미스터리가 크든 작든 그 모두를 예민하게 살피고, 무엇보다 거기서 자기 이해를 갈망했던 작가다. 그는 《명랑한 은둔자》에서 혼자 살고 혼자 일했고, 가족과 친구와 개와 소중한 관계를 맺으며 자기 앞의 고독을 외면하지 않았던 삶을 이야기한다. 또한 알코올과 거식증에 중독되었으나 그로부터 힘겹게 빠져나왔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옥죄었던 심리적 굴레를 벗어나 자유와 해방감을 경험한 한 인간의 깨달음을 들려준다. ”

“이전에 나는 냅의 글을 하나의 키워드로 요약하라면 ‘중독’이 그 키워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명랑한 은둔자》를 옮기고 나니 그 생각이 바뀌었다. 냅의 글은 늘 변화에 관한 이야기였다. 과거의 악습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고 애쓴 이야기, 느닷없이 닥친 상실이나 깨달음을 수용하려고 애쓴 이야기였다. 단순히 중독을 극복한 성공담이 아니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제나 조금은 달라질 수 있고, 달라지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점점 더 편안한 (더 자유롭고, 더 즐겁고, 더 자신다운) 자신이 될 수 있다고 증언하는 글이었다. (……) 자, 여기 책으로 저를 (아주 조금이지만) 바꾼 작가를 소개합니다, 그립고 기쁜 마음으로.”

―김명남 옮긴이

캐럴라인 냅은 거의 평생 고독의 즐거움과 고립의 절망감 사이에서 줄타기했던 사람이다. 브라운 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할 만큼 매우 지적이고, 졸업 후 저널리스트로서,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명성을 이어갔지만, 사실은 수줍음을 많이 타고 혼자 있는 시간에 평온함을 느끼는 내향성의 사람이다. 누구보다 가족과 친구와 개에 대한 사랑이 넘쳤지만,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공허와 불안과 사투를 벌였던 사람. 그런 자신이 지나치게 별나다는 생각이 들어 다음 생에는 너무 거창하지도 너무 복잡하지도 않은, 그냥 보통의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한 사람. 이런 사람이 자기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그 감정과 생각의 결을 낱낱이 풀어낸다. 아마 냅의 글을 읽는 사람들은 예의 이 솔직함에 웃고, 울고, 아플 것이다. 캐럴라인 냅의 글은 감정이입과 몰입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자를 강렬하게 끌어들인다. 냅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알고서는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캐럴라인 냅의 삶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중독, 결핍, 가족, 반려견, 우정, 사랑, 애착, 일, 성장, 슬픔, 상실, 고립, 고독……. 특히 중독은 냅의 삶에서 빠질 수 없는 키워드다. 그는 알코올 중독과 거식증을 겪으면서 자신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보았고, 그 까마득한 어둠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 다시 한번 자기 자신과 정면으로 맞서는 시간을 보냈다. 누구보다 캐럴라인 냅의 삶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옮긴이 김명남의 말처럼, 냅은 자기 이해와 수용, 그리고 변화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애썼고, 더 자유롭고, 더 즐겁고, 더 자신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자신의 강함과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삶의 명랑을 깨달은 저자로부터, 우리는 만난 적 없지만 오래 이어온 듯한 우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냅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 같고, 내 친구 이야기 같다. 이것이 냅의 재능이고, 그의 글이 가진 힘이다.

자기 앞의 고독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의 강함과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결국 삶의 명랑을 깨닫는다는 것

“무엇보다 오래 기억될 만한 점은, 냅이 혼자 살고 혼자 일하는 여성으로서 자신의 인생을 솔직하게, 전혀 감상적이지 않은 눈으로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커 커스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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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럴라인 냅은 2002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한 미국 작가다 (2002년 4월 폐암 진단을 받았고 5월에 결혼을 했고 6월에 죽었다) 생전에 세 권의 책과 사후에 두 권의 책.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냅의 글은 이것이 전부다.

주로 20대와 30대에 겪었던 거식증과 알코올 의존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정신분석학자였던 아버지, 화가였던 어머니의 죽음과 이별에 대해서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에게 집착하면서 느낀 분노와 자기혐오의 감정, 세상으로부터 고립되는 것들, 여전히 어린 내면의 자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명랑한 은둔자』는 냅이 30세부터 42세까지 <보스턴 피닉스>와 <살롱>에 기고한 글들을 모은 책이다.

책 목차 중에 ‘명랑한 은둔자’에 대한 글을 책 제목으로 뽑았는데 이 명칭이야말로 캐럴라인 냅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한편 이 책의 키워드는 ‘증독’이다. 그녀가 거쳐야 했던 수많은 중독들. 알코올. 음식, 사랑, 관계, 고독... 일....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녀의 기록들이다.



고독과 고립에 대해 케럴라인은 고립은 두려움과 자기 보호에 관련된 것, 즉 스스로 고치를 만드는 것이며, 음흉하게 사람을 포위하는 것이라 말한다. 고립되었지만 지금은 그냥 고독한 사람일 수 있다. 고독은 우리를 보호해주는 형제. 아니면 연상의 친구와 같은 것이다. 너무 잘 알기에 침묵조차 공유할 수 있다. 고독은 기분 좋은 메시지로 우리를 격려한다. “ 여기 앉아 긴장을 풀어, 일에서 벗어나렴 넌 그래도 돼.”라고 고독은 속삭인다. 그러나 고립은 “넌 바깥세상과 안 맞아, 그러니 늘 그 모양이지 네 삶에 별로 도움되는 사람도 없잖아.”라고 속삭인다. 고독과 고립의 경계 어디쯤에서 균형을 잡으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을까?

고독의 즐거움과 고립의 절망감 사이에서 우리는 늘 흔들린다. 그녀처럼.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산뜻하고 멋진 말이다. 만약 누군가가 어제 내게 내 존재를 한 문장으로 설명해보라고 말했다면 나는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았을 것이다, 나는 독신여성에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서른여덟 살이고 외톨이처럼 살아요. 이 말이 슬픈 노처녀를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듯이 내 목소리에 변명의 기미가 어려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미안해요.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어요. 지금이면 진작 결혼했어야 하는 건데 하고 멋쩍게 어깨를 으쓱했을지 모른다./ P 41

하지만 지금 그녀는 행복하게 혼자이며 명랑하게 은둔 중이란 생각을 문득 한다. 단순한 사실적 진술 하나가 완전한 문장의 형태로 그녀의 머릿속에 자리 잡고 그녀는 그 말을 되새긴다.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이 한마디 말은 마법처럼 새로운 전개, 새로운 분위기, 새로운 의미를 그녀의 삶에 부여한다.


“우리”라는 단어는 꽤 무거운 단어다. 공동체 속에서 ‘우리’라는 표현은 흔하다. 우리 가족,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회사, 우리 동아리... 수많은 ‘우리’들은 낱낱의 개인을 뭉뚱그려 놓는다. 또한 ‘우리“는 우리인 것과 우리 아닌 것을 확실히 구분 지어 버린다. 우리 안에 속하지 않는(못하는) 것들은 ’ 우리‘라는 거대한 언어의 장벽 앞에 좌절한다. ’ 우리‘로서의 삶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세상에는 ’ 우리‘가 아닌 채로 '그냥 자기 자신'인 채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캐롤라인 냅은 아마도 그런 부류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도 그런 부류에 가깝다. 그럼에도 ’ 우리‘라는 울타리 속에 들어와 있다. 그러하기에 나는 늘 ' 우리'밖의 세계를 동경하고 오직 ’나‘를 찾기 위한 세계를 열망하고 있는지 모른다. 끊임없이 ’나‘로 살아가기 위한 존재 증명 투쟁을 하는 것인지도.....



동성끼리의 우정, 특히 여성끼리의 우정은 최초의 중요한 유대감이었던 어머니와의 유대감과 닮아있으며 과거 영장류였던 시절 암컷들의 연대를 떠올리게 한다. 여성들은 남성과 달리 경쟁을 덜 가르치는 조건에서 성장하며 협조하고 순응적인 태도를 지니도록 교육받는다. 동성 간의 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헌신과 에너지가 필요하듯 동성끼리의 우정도 예외가 아니다. 동성과의 우정은 부수적이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고 캐럴라인은 말한다.


부모의 죽음을 생각해본다는 것

캐럴라인 냅의 정의에 따르면 ‘부모님 은혜의 시기’는 당신이 부모에게 복종하지 않아도 될 만큼은 나이가 들었지만 아직 부모를 걱정할 만큼은 나이가 들지 않은 그 짧은 기간을 뜻한다. 부모님들이 나이 들어가면서 자식의 관점에도 변화가 생긴다. 두려움과 최책감을 느낀다.

예를 들면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드리지 못한다면 나는 남은 평생 죄책감을 느낄 거야.” 같은 감정이다.

죄책감과 사랑은 본능적으로 하나로 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긴 시간이 걸린다

부모님 은혜의 시기가 끝나면 우리의 순수의 시대 중 후반부의 한 단계도 끝난다. 그분들이 언제까지나 거기 계시지 않을 것이고 우리들이 삶이 더 간단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은 한꺼번에 오지 않고 슬금슬금 다가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방에서 쌍둥이 언니의 아기가 태어난다. 병에 걸린 아버지가 무력해진 방, 태어난 아기는 당분간 무력 하다. 아버지와 아기의 무력함은 다르지만 돌보아야 한다는 본질에서 같다.

방 한구석에 놓인 어머니의 가방을 바라보는 것으로 또다시 애도가 시작된다

“ 저기 가방이 있네 엄마는 돌아가셨지, 저기 엄마가 부엌에서 차를 담아두던 통이 있네. 그런데 엄마는 돌아가셨지....” 엄마가 살아 숨 쉬던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모두 엄마의 기억을 품고 있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야 비로소 엄마의 투덜거림을 그리워한다. 엄마의 ‘투덜거림'은 엄마 또한 관심받고 싶다는 표현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돌아보면 자식들은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부모와 함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면서도.


성인이 된 두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 밑바탕에는 늘 무언가를 기다리는 마음이 깔려있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나는 무슨 일이 벌어지기를 기다렸고,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렸고, 내게 맞는 남자나 직업이나 신발, 옷, 헤어스타일 따위가 휙 하고 나타나서 나를 바꿔주기를 기다렸다. 내가 행복하고 남들에게 인정받고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외부에서 내게 주입해주기를 기다렸다 / p 155


그녀처럼 나도 내 젊은 날 무언가를 기다렸다. 호박마차와 왕자님, 백마.. 보장된 미래, 같은 것, 젊음의 시간은 유난히 길어 보였고 더디 가는 것 같았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직장생활은 지루했고 사각형 사무실은 가슴을 조이는 듯했다. 젊음은 버거웠고 젊음을 소비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때는 그토록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던 젊음을 나는 이제야 그리워하고 있다. 돌아갈 수 없음을 당연히 알면서도....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다. 그 상황에 있을 때는 어떻게든 지나가기를 바라고 지나가고 나면 그 상황이 다시 그리워지는 것 말이다.

슬픔의 가장자리, 삶의 가장자리에 늘 부딪치기만 하면서... 삶의 주변으로 걸어가지 못한 채로... 그렇게 그 시간들을 지나와 버렸다.



사람은 누구나 양가감정이 있다.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기도 한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시간을 보내면서도 혼자 있는 시간을 갈망하고 눈 앞에 먹을 것이 쌓여있어도 먹기를 거부하고, 사람들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초대해주지 않으면 실망하기도 하고, 나를 통제하면서도 놓아주고 싶고,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면서도 참견하지 말라고 딴 소리를 하고, 욕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욕구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캐럴라인의 글이 우리의 폐부에 와 닿는 것은 바로 이런 솔직함 때문이다. 상황을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로 옆에 그녀가 있는 것처럼. 그녀가 느끼는 양가감정이 바로 나의 감정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거식증에 걸린 그녀는 굴복하지 않는 것, 굴복하지 않는 것, 굴복하지 않는 것이라는 주문을 외우며 자신을 혹사한다. 부엌에서 친구들과 함께 중국음식과 맥주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면서도 거리를 달리러 나간 그녀... 그녀가 굴복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결국은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까? 굴복하고 싶지 않다. 나 또한 나 자신에게.


외로움에 대하여

외로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말 걸 사람이 아무도 없는 파티에 있을 때 느껴지는 단절의 외로움,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찾아드는 그리움의 외로움, 사람과 접촉하지 않은 채 내리 며칠을 보내면 생겨나는 고립의 외로움들... 그런데 내가 제일 잘 아는 외로움은 일요일 오전의 그리움이다. 이것은 종종 사전 경고도 없이 마음속에서 솟아난다. 일요일의 외로움에 누군가 딱지를 붙인다면 ‘취급주의- 초강력’이라고 붙어 있을 것이다 / P 183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다.’라고 말을 하는 것도 진정 외로운 이에게는 ‘폭력’ 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라는 공간에 발을 담고 있으면서 일시적으로 갖는 외로움과 ‘우리’로부터 평생을 배제된 체 외로움을 견디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그녀가 겪었을 일요일 오전의 외로움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평일날 느끼는 외로움과는 다른 걔념이다. 모든 일의 분주함들이 잠시 멈춘 것 같은 일요일 오전의 적막함과 고요. 그 속에서 고립된 채 맞는 외로움은 생각보다 깊고 날카로울 것 같다.


"그냥 보통의 삶. 나는 보통 사람이 되는 수업을 듣고 싶다. 이런 나를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나는 평범한 노동자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시민, 바글거리는 군중 속의 이름 없고 얼굴 없는 한 구성원이고 싶다. 당신은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가? 당 신고 혹시 그러고 싶은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이것이 얼마나 손에 넣기 어려운 목표인지 알 것이다. 이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목표다. 이것은 밤에 잠 못 이룬 채 인생의 대부분의 순간에 당신의 손을 벗언 있는 듯한 단순함을 열망하는 마음이다. 겸손한 영혼을 갈망하는 마음, 당신의 기대를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낮춰 줄 현실적 세계관을 갈망하는 마음이다. 쉬고 싶은 마음, 당신 아닌 존재가 되려고 발버둥 치기를 그만두고 그냥 당신으로 존재하고 싶은 마음이다. / P 285


'당신 아닌 존재가 되려고 발버둥 치기를 그만두고 그냥 당신으로 존재하고 싶은 마음‘

이 부분에서 생각이 멈춘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자신 이상의 자신’으로 살고 싶은 열망을 품는다. 그것을 좋게 표현하면 ‘이상’이고 솔직하게 표현하면 ‘욕망’이다. 내가 아닌 무엇, 나보다 나은 무엇. 자신을 끝없이 부정하려 드는 이유 중 하나는 사회가 경쟁의 도가니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나대로, 나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없게 만드는 구조, 거대한 흐름 속 자칫하면 루저가 되기 쉬운 삭막한 현실... ‘보통으로 살고 싶어요’라고 외치는 사람은 어리석은 이처럼 치부된다.

캐럴라인은 ‘보통의 평범함 “이 인생에서 얼마나 이루기 어려운 목표인지 이야기한다.

‘너머의 삶’을 갈망하나 대부분은 ‘보통의 삶’을 살지도 못한다. ‘자신 이상의 자신’으로 살고 싶으나 ‘본래의 자기’로 살아가기도 어렵다. 그녀의 말처럼 ‘당신 아닌 존재로 발버둥 치는 것’을 멈추고 본래의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할 것 같다.


캐럴라인이 살아있다면 지금은 60대일 것이다. 이미 세상에 없는 그녀가 남긴 책이 우리에게 대신 말들을 전한다. 이 책은 겉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처럼 보이는 그녀가 고독과 고립 사이에서 투쟁하고 뼛속까지 스미는 외로움, 알코올 중독, 거식증, 애도, 이별.. 수많은 삶의 변수 가운데에서 투쟁한 민낯의 기록들이다.

헐렁한 수면 바지를 입고 식탁 앞에 앉아 시리얼을 먹으며

“나는 명랑한 은둔자야." 라고 중얼거리는 캐럴라인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이미 세상에 없는 그녀를 처절하고 아름다운 한 권의 책으로 기억한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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