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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가다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뚜렷이 존재하는 것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오면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해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 애 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때어놓았다.

< 무진기행 > 김승옥


안갯속에서

안갯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숲이며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인생이 아직 밝던 시절엔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건만
이제는 안개가 내리어
보이는 사람 하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놓는 그 어둠을
조금도 모르고 사는 사람은
참으로 현명하다 할 수는 없다.

안갯속을 헤매면 이상하여라!
인생이란 고독한 것
사람들은 서로 모르고 산다.
(헤르만 헤세·독일 시인, 1877-1962)


안갯속으로 차를 달려가면 먼 데서 점멸하는 샛노란 불빛이 다가온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안갯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다 보면 무언가 보이지 않던 형체들이 비로소 드러난다. 깜깜한 밤. 앞 차의 자동차 불빛을 보며 길을 헤아리듯 안갯속에서는 다가오는 차들의 샛노란 불빛으로 거리를 가늠한다. 안개에서 오고 안갯속으로 사라진다.

아무도 모르게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먼산과 도로와 도시의 빌딩을 점유해버린 새 하얀 것들....

오래전 지구 과학 시간에 배웠던 지식들은 모두 헛것이다. 복사 안개니 이류 안개니.... 하는 것.

학창 시절 안개 생성 원리를 기억하고 암기하던 일들은 사실 살아가는데 무의미한 것들이다. 돌아보면 우리가 배워왔던 것들이 실 생활에서 무슨 의미를 갖는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안갯속을 달리면서 안개가 왜 생겨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안개 구간을 감속해야 하고 집중해야 하고 헤드라이트 불빛을 주시해야 한다는 명백한 사실뿐.


다가오는 안개들은 낭만적이다. 새하얀 것들, 잡을 수도 안을 수도 없는 것들은 몽환적이다.

헤르만 헤세의 시에서처럼 ' 안갯속을 헤매면... 숲이며 돌은 저마다 외로움에 잠기고 나무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다. ' 모두가 혼자인 채 안갯속을 달린다. 저마다의 리듬에 맞춰..

안개에 가려진 나무. 희미하다. 늘 한 그루인 나무. 그 옆에 허름한 컨테이너 박스 하나. 누구의 소유도 아닌 그 나무를 바라본다. 멀리서 보면 작아 보이는데 안갯속을 저벅거리며 헤치고 나무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 보면 그렇게 작은 나무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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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가는 것. 삶의 길은 내비게이션으로 검색할 수 없는 길..설령 검색할 수 있다 하여도... 앞에 무엇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

안갯속을 달리다 보면 어딘가 안개의 끝에 이른다. 안개의 끝에 이르는 것인지. 안개가 스스로 걷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손으로 잡을 수 없지만 또렷이 존재하는 무엇들.

결국 삶은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닐까. 존재하지만 알 수 없는 것.

안개에 가리어져 있지만 실재하는 한 그루의 나무. 아름답지도 우람하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나무.

멋진 풍경 속의 일부도 아닌 그 나무에 자꾸만 시선이 가는 것은 오직 홀로 있어서다.

나무는 한 자리에서 평생을 보낸다. 안개, 비바람, 눈보라... 그보다 더한 무엇이 오더라도../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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