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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 히파티아

인생은 닫혀있는 게 아니다.

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

인생은 닫혀 있는 게 아니다.

생각할 권리를 마음껏 누려라

- 히파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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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파티아는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여성 수학자이자 철학자이다. 학자로서의 명성을 떨쳤으나 그녀가 추구한 과학적 이성주의에 반감을 가진 기득권 세력에게 살해당했다.


히파티아의 아버지는 알렉산드리아 대학의 저명한 수학교수이자 대학의 책임자였다. 당시에는 수백 년 동안 박해받던 기독교가 로마 황제에 의해 공인되고, 마침내 로마제국의 국교로 지정되는 등 기독교가 크게 위세를 떨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리스 사상은 이단으로 배척당하여 수학과 과학, 철학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히파티아는 아버지로부터 수학뿐만 아니라 그리스 수학 사상을 지켰던 학자로서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히파티아는 수학과 과학의 응용에 관심이 많았다. 별과 행성의 고도를 측정하는 기구인 아스트롤라베를 만들었고 수중 투시경과 같은 여러 가지 과학기구들을 제작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수학 교과서를 수정하고 개정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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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알렉산드리아는 세계 수학의 중심지로서 세계 모든 국가의 학자들이 모여 서로의 사상과 학문을 나누고 교류하는 장소였다. 히파티아는 학자로서의 명성을 이곳 알렉산드리아에서 떨쳤다.

그러나 히파티아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당시 지배층에 있던 사람들은 히파티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들은 주로 기독교와 유대교의 지도자들로 폭넓은 학식을 갖춘 히파티아가 지식인들과 모임을 갖고 민중들의 입장을 앞장서서 대변하자 그녀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게 된다.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급급했던 정치인들도 히파티아를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하면서 히파티아가 사람들은 선동한다고 비난했다.

서기 414년 어느 날 결국 그녀는 대학으로 강의하러 가던 중 광신적인 기독교 수도승들에게 살해되어 세상을 떠났다.


히파티아의 어머니는 히파티아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 테온은 혼자서 히파티아를 길렀다. 테온은 히파티아가 훌륭한 학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는데 사물을 관찰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분별력도 기르도록 교육받았다. 폭넓은 지식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그녀의 강의를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왕과 철학자들로부터 수차례 결혼 제의를 받았으나 “나는 진리와 결혼하였다”라고 대답하며 구혼 제의를 거절하였다. 한편 “철학자에게”라고 주소가 쓰인 편지는 의례히 그녀에게 배달되었다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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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언

- 인생은 닫혀 있는 게 아니다. 우선 가까이에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일들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다.

- 생각할 권리를 마음껏 누려라. 잘못 생각하는 것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낫다. -


<히파티아는 370년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여자가 하나의 소유물로 간주되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달랐다. 남성 지배 사회에서 그녀는 남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거침없이 활동했다. 무엇보다 그녀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뭇 남성의 구혼을 거절했다. 히파티아가 살던 당시의 알렉산드리아는 오랫동안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기독교가 이교도들의 영향과 문화를 뿌리째 뽑아내려고 하던 중이었다. 히파티아는 이 막강한 세력들의 진앙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당연히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인 키릴루스는 그녀를 혐오하였는데 그녀가 로마 총독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이 혐오의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히파티아가 이교도의 과학과 학문이 상징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이었다.

초기 기독교에서는 과학과 학문을 이교도의 사상이라고 폄훼하였으니 키릴루스의 혐오에는 충분한 이유가 된 셈이었다. 그러나 히파티아는 자신에게 밀려 닥치는 개인적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해서 자기의 주장을 가르치고 글로 발표했다. 415년 자신의 일터로 가다가 광신 폭도들에게 붙잡히는데 그들은 전복껍데기로 만든 무기로 그녀의 살을 뼈에서 발라낸 다음 남은 시신과 그녀의 저술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이렇게 해서 그녀의 이름은 역사의 기록에서 사라져 오랫동안 잊혔다. 키릴루스는 나중에 성인의 반열에 올려졌다.>

-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p 666~667 인용



진리와 결혼한 여자 히파티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운명도 히파티아의 운명과 함께 쇠락하였다.

진리에 대한 탐구. 당시 여성은 ‘존재’가 아닌 ‘소유물’이었던 시대에 거침없이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낸 여자 히파티아는 뛰어난 철학자이면서 과학자이면서 수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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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도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된 그녀는 그녀가 사랑하던 책들과 함께 불태워졌다.

그녀에게 죄가 있다면 아마도 ‘진리와 결혼’한 죄가 아니었을까.

흔히들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한다.

페미니즘... 히파티아는 페미니즘을 주창한 여성학자는 아니었다. 여성의 권리를 요구할 수도 없던 시대에 히파티아는 자신의 탁월한 능력 하나로 남성 중심 사회에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에 앞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은 스스로 ‘충만함’이 아닐까 생각한다.

자신이 채워지지 않은 채로 누군가 채워주기를 바라는 것. 혹은 무언가가 저절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여성들. 대부분 클레오파트라는 알아도 히파티아를 아는 이들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생각해보면 양귀비나 클레오파트라를 먼저 떠올리는 것 또한 여성의 ‘아름다움’을 중심으로 고정된 시각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양귀비나 클레오파트라는 미모를 바탕으로 수많은 남성들을 자신의 옆에 둘 수 있었다는 것 외에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다. 최고 권력자의 애인이자 아내였다는 명확한 사실...

그녀들 또한 히파티아처럼 미모 외에 더 탁월한 능력들이 있었을지라도 우리 기억 속에 그녀들은 오직 빼어난 미모로만 기억된다.


히파티아에 대한 컬 세이건의 글을 읽으면서도 불편한 한 가지는 “무엇보다 그녀는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라는 부분이다. ‘무엇보다’라는 말이 주는 미묘한 불편함.

히파티아 그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단한 미모가 아니었을 텐데 그녀에 대해 언급한 칼 세이건은 ‘무엇보다 대단한 미모’라고 표현하고 있다. 히파티아가 살아서 그의 글을 들여다본다면 분노할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아름다움 또한 하나의 능력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외적인 아름다움이 ‘무엇보다’라는 수식어로 한정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히파티아의 죽음과 관련하여 굴 껍데기, 진주 껍데기에 의해 살이 찢겼다고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에드워드 기번의 상상력에 기반을 둔 것이라 한다. ostrakois가 굴 껍데기란 의미인 것은 맞지만 그리스어로 꼭 굴 껍데기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며 깨진 도자기 조각, 타일 조각, 조개껍질들을 통틀어 그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하니 히파티아의 죽음에 이르게 한 도구가 굴 껍데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은 닫혀있는 게 아니다

의식이 깨어있는 유식한 아버지 덕분에 히파티아는 학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인생은 닫혀있는 문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인생이란 열려있는 통로와 같은 것이었고

그 통로의 끝까지 거침없이 질주했다.

인생이 닫혀있는 것이라 생각하였다면 그녀는 ‘무엇보다 대단한 미모’를 앞세워 로마 총독의 부인이 되었거나 어느 왕국의 왕비가 되었거나 했을 것이다. 만일 그러하였다면 어쩌면 우리는 그녀를 클레오파트라만큼 유혹적인 팜므파탈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히파티아는 강의를 하러 가던 중 살해당했고 그녀를 저격했던 키릴루스는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이 묘한 느낌을 준다.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날 기회가 주어진다면 만나고 싶은 여인이 바로 히타피아다.

기록으로만 존재하는 그 시대 모습 그대로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그녀와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흥미로운 상상을 해본다.

“생각할 권리를 마음껏 누리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리는 듯하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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