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파놉티콘의 시대
간간이 비가 내린다.
우산을 쓰고 한 손으로 짐을 들고 내리다가 우연히 조수석 앞 쪽을 보니 거대한 스크래치가 보인다.
차가 하얀색이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상당히 큰 흠집이 나있고 깊게 파여있다. 아마도 수리를 맡긴다면 범퍼 부분을 전부 교체해야 할 정도니 견적이 상당히 나올 것이다. 대체 언제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일까...
월요일 세차를 하고 타이어 공기압을 맞출 때까지 조수석 앞부분에는 흠집 하나 없었다.
그러하다면 월요일 주차 이후부터 목요일 자정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차량용 블랙박스를 꺼내 살펴보니 주행 중 녹화는 남아있으나 주차 녹화는 당일 것 밖에 남아있지 않다. 주차 시간 내내 누군가 지나가기만 해도 자동 녹화가 되다 보니 앞부분은 이미 다 지워지고 당일 주차 건만 남아있다. 스크래치를 발견한 날은 조수석 쪽에 커다란 기둥이 있는 곳에 주차를 해서 다른 차가 흠집을 낼 수 없다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거니 cctv 확인을 요청하는 신고서를 작성해달라고 한다. 차번호와 주차해둔 위치, 시간 등을 적어두고 나왔다. 예전에는 차주가 직접 cctv 확인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금지 사항이라 한다.
“왜요??”
“네. 이게 개인정보 보호,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 입주민이 cctv를 직접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만일 범죄 사건 같은 경우는 경찰 입회하에 입주민이 열람 가능하고요.”
관리사무소 담당 직원이 내가 신청서에 적어둔 날짜와 시간을 집중적으로 확인해보고 연락을 주겠다 한다.
결국은 어떤 정황은 있는데 그것이 내 차에 정확히 그 위치에 흠집을 낸 것인지는 모호하다고 연락이 왔다.
‘정황은 있으나 그 차가 내 차에 흠집을 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맞는 말이면서도 맞지 않는 말이다. 정황만을 가지고 그 차를 의심한다면 세상은 정황이 곧 사건의 단서가 되는 꼴이 될 것이다. 정황만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모두 잠재적 범법자가 될지도 모른다. 분명 특정 차가 주차 과정에서 의심 가는 행동을 하였으니 적극적으로 확인해 볼 필요는 있지만 관리사무소 입장에서는 이런 복잡한 상황이 불편한 것이다.
내 차의 블랙박스에 찍힌 영상을 가지고 그 차주와 직접 이야기를 한다면 모르지만 블랙박스에 증거가 남아있지도 않는데 불명확한 cctv를 토대로 중간에서 관리사무소가 나서기가 미묘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마도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자신의 차에도 만만치 않은 흠집이 났을 터인데 내려 보지도 않고 그냥 그 장소를 이탈했다는 것은 설령 알았다고 해도 연락처를 남기거나 수리를 해주겠다는 의도는 없는 셈이다.
매일매일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자신을 탓해야지... 별다른 도리가 없다.
내 차에 녹화된 블랙박스를 돌려보다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아파트 입주민이 cctv를 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일 녹화된 주차 영상 속에 찍힌 이웃들, 익숙한 이들의 움직임이 보인다. 무거운 짐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고 지나가는 아저씨, 양 손에 무언가를 들고 있느라 턱에 전화기를 끼고 통화하는 사람. 마주 위치한 차에서 두 사람이 내리고 큰 소리를 내며 말다툼을 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먼저 계단으로 이동하고 남은 한 사람은 소릴 지르며 뒤쫓는다. 누군가는 쓰레기를 줍고 누군가는 방금 마신 음료 캔을 주차장 바닥에 휙 던지고 지나간다. 누군가는 웃고 지나가고 누군가는 심각한 표정으로 지나간다. 또 누군가는.... 누군가는.... 누군가는...
그 수많은 누군가들 중 익숙한 얼굴들도 있다.
내 차 블랙박스가 찍을 수 있는 범위 내의 모든 것들이 찍혀있다.
누군가의 차 블랙박스에 나의 영상도 찍혀있을 것이다. 늘 비슷한 시간에 주차를 하고 늘 비슷한 차림으로 수레에 빌려온 도서관 책들을 옮겨 싣고 노트북을 손에 들고... 때로는 장을 본 물건들을 낑낑대며 들고 움직이는 모습. 어떤 날은 우아하게 웃으며 걸어가고 어떤 날은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차문을 열고 또 어떤 날은 피곤에 찌든 모습으로.... 누군가의 차 블랙박스에 안에 찍힌 나는 수많은 누군가들 중의 하나이다.
일상을 복기하는 일.... 화요일 오전 11시에는 차를 어디에 주차하고 무슨 일을 보았는지 금요일은 어디 어디를 들렀는지 블랙박스를 보니... 이미 기억 속에서는 사라진 것들이 생생하다.
감시사회... 스스로를 감시하는 사회인가...
어쩌면 세상은 거대한 파놉티콘인지 모른다.
파놉티콘은 영국의 공리주의 사상가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원형감옥으로 최소한의 감시자가 최대한 많은 수감자를 감시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의 파놉티콘(panopticon) 설계도(1791년)
‘Panopticon’이라는 용어는, 그리스어로 ‘두루’를 뜻하는 ‘pan’과 ‘보다’를 뜻하는 ‘opticon’이 합쳐진 말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사고를 갖고 있었던 벤담은 많은 인원에 대한 효율적인 감시와 통제가 필요한 군대, 병원, 공장, 학교, 감옥 등에 파놉티콘 구조가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생전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중앙 감시탑에 있는 최소한의 감시자가 여러 수감자를 동시에 감시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감자는 감시자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감시자의 시선과 관계없이 감시 효과가 발생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Surveiller et punir)>(1975)에벤담의 파놉티콘 개념을 근대국가의 권력 작용으로 재조명했다. 파놉티콘과 반대로 시놉티콘(Synopticon)은 대중이 권력자를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리스어로 ‘함께, 동시에’를 의미하는 접두사 ’Syn’과 ‘관찰하다, 지켜보다’는 뜻의 ‘Observe’의 합성어로 ‘동시에 서로를 지켜본다(감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소수 권력자가 다수 대중을 감시한다는 의미를 가진 파놉티콘과는 반대 개념이라 역파놉티콘(Reverse Panopticon)이라고도 부른다. 시놉티콘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노르웨이의 범죄학자 토마스 매티슨(Thomas Mathiesen)으로 그는 대중이 언론을 통해 권력자를 감시·견제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블랙박스는 누군가를 늘 지켜본다. 누군가들의 차에 장착된 블랙박스가 쉼 없이 돌아가며 그날 그 시간 그곳을 지나는 모든 이들의 일거 일투족을 감시한다.
지나가는 누군가들은 누군가의 감시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마치 거대한 파놉티콘에서 감시자의 시선 방향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만일 기계가 아닌 특정한 누군가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면 당연히 항의를 하거나 신고를 할 것이다. 기계 안에 녹화되는 모습들. 무의미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도 한다.
블랙박스를 바라보며 이미 잊힌 일상을 복기한다. 특별할 것도 없고 지극히 사소한 일상이다. 그 안에서 나는 어떤 날은 견디지 못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잘 견디기도 한다. 내 블랙박스에 찍힌 그들도 마찬가지다. 웃거나 울거나 화를 내거나 찡그리거나 무언가를 들고 움직이거나 바쁘게 걷거나 통화로 험담을 하거나.... 무표정이거나... 본의 아니게 블랙박스에 찍힌 사람들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주차 중 흠집을 내고 그냥 가버린 차량은 끝내 찾지 못하였다.
찾을 수 있는 방법도 없거니와 경찰까지 대동하고 cctv를 본다는 것도 사실 무의미하다는 생각이다.
불쾌하지만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누군가가 버린 양심이 누군가의 블랙박스에는 정확하게 찍혀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누군가의 차에는.... 더 정확하게 남아있을지 모른다. /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