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카유보트의 <비 오는 날, 파리 거리>와 윤흥길의 <장마>
장마가 시작되고 있다. 올해는 늦은 장마 혹은 지각장마라 한다.
‘장마’를 검색 창에 입력하니 장마에 대한 다음의 설명이 뜬다.
“ 장마는 동아시아 하계 계절풍 기후의 일환으로 일반적으로는 북태평양 기단과 오호츠크 해 기단 사이에서 형성되는 한대 전선에 의해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여러 가지 기상학적·기후학적 영향을 받으므로 변화와 불규칙성이 매우 크다. 한국의 경우 6월 하순 남해안에 동서로 길게 장마전선이 정체하게 되고 구름 영역이 넓게 형성되어 구름량이 증가하고 전선대를 따라 서쪽으로부터 연속적으로 이동하는 저기압에 의해 강수 현상이 지속된다. 비가 많은 때 강수량은 1일 평균 17~20㎜이며 장마의 종료는 대체로 7월 30일에서 8월 3일 전후로 강수량이 감소하고 무더운 여름이 시작된다. "
학창 시절 지구과학 시절에 줄기차게 외웠던 기단. 4가지 중 북태평양 기단과 오호츠크해 기단이 장마전선을 형성한다. 거대한 구름 덩어리.... 지속적인 강수를 동반하는... 장마는 지루하지만 장마의 끝은 곧 무더위의 시작이다. 장마는 어쩌면 무더위의 전초 신호인지도 모른다.
장마를 영어로 rainy spell in summer이라 한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여름에 내리는 비의 마법(주문)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비의 주문이나 비의 마법이라니...
Summer begins with a rainy spell, which is called "jangma" in Korean
한국어 그대로 표기하면 : jangma이다.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당분간 비의 마법에 빠져드는 시간이 될 것 같다.
비가 내리는 날, 삭막한 도시는 조금은 인간적인 표정이 된다. 원래 인간 human의 어원은 ‘습하다’에서 기원한 것이라 하니 비가 내려 습한 환경이 만들어지면 정서적으로 편안해진다. 물론 장마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들도 많다. 어떤 의미로는 장마는 낭만적일 수가 없다. 적당한 수준의 비의 주문을 기대해본다.
비 오는 날 늘 떠오르는 그림이 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의 작품
<비 오는 날, 파리 거리 Paris Street; Rainy Day>(1877년) 다.
마치 한 편의 사진을 보는 듯한 유화, 그림에 등장하는 거리는 파리 생 라자르 역 부근의 투린 가(Rue de Turin)와 더블린 광장(Place de Dublin)이 만나는 지점이라 한다. 실크햇을 쓴 남자와 잘 차려입은 여자. 지나가는 행인들의 모습. 바로 그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유화임에도 잘 찍은 사진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카유보트는 1830년대에 개발된 사진의 효과를 그림에 적극적으로 응용한 화가였다.
우산 속 두 남녀는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의 몸을 절반만 표현함으로써 우산 속 남녀를 돋보이게 하면서 사실적 느낌을 준다.
구스타프 카유보트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자주 상제르 역 거리를 걸었을까? 비 오는 날이 주는 사실적 느낌을 구현하기 위해 커다란 투명 유리창이 있는 카페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얼마나 자주 스케치하였을까? 커다란 우산을 쓰고 걷는 세련된 도시 남녀. 비가 온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대충 입지 않고 잘 차려입은 그들은 프랑스 ‘파리’가 주는 느낌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림 속, 여인의 또각 거리는 발소리와 시원한 빗소리의 2중주가 들려오는 것 같다.
카유보트는 인상파 화가로 활동하면서 부유한 부모를 둔 덕에 화가들의 작품을 구매하거나 전시를 개최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고전적인 규범에서 벗어나 일상적인 파리의 모습을 그리는 것을 좋아했고 19세기 새롭게 변화하는 파리의 풍경을 재현했다. 그의 작품은 치밀한 화면 구성과 화면을 구성하는 각 요소들 간의 균형, 독특한 구도, 대담한 원근법의 사용 등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대부분의 인상주의 화가들과는 달리 남성이 작품의 주제로 부상했다. (위의 작품에서도 남성들이 주로 등장한다)
고흐의 그림을 보면 가난한 화가로서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 카유보트의 작품을 보면 고통보다는 세련, 깔끔, 우아, 여유로움, 색채의 신비, 사실감, 미학적 구도 등이 먼저 다가온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작품이 갖는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지만 부유한 집안 환경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감 하나 사는 데도 돈이 없어 쩔쩔매는 화가와 엄청난 재력을 지닌 부모를 스폰서로 둔 화가의 현실은 당연히 그림에 반영되게 마련이다. 1877년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 출품작이었던 <비 오는 날의 파리 거리>가 오래된 그림처럼 느껴지지 않고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사진 기법의 활용과 세련된 감각 때문인 듯하다.
윤흥길의 작품 『장마』 장마철이 되면 다시 꺼내 읽게 되는 소설이다. 분단, 대립, 이념, 사상, 혈연, 미신.... 이런 것들이 ‘장마’라는 길고 지루한 비와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이 작품의 서술자인 소년 동만은 전쟁이라는 악몽 같은 현실 속에서 죽음, 인간관계의 비정함, 폭력성, 신의, 약한 자를 돕는 이타심, 연민 등을 깨달아간다.
긴 장마가 지루하게 계속되던 어느 날, 동만의 집에 국군 소위로 전쟁터에 나간 외삼촌이 전사하였다는 연락이 온다. 동만의 외할머니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충격으로 빨치산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다. 빨치산이 되어 산속에 숨어 지내는 아들을 둔 친할머니는 외할머니의 독설에 분노하고 두 노인의 대립 때문에 조마조마한 일상을 보낸다. 친할머니는 빨치산이 된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을 믿고 아들을 맞을 준비를 서두른다. 점쟁이가 말한 그날이 되었지만 삼촌은 돌아오지 않고 대신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나타나는데 이를 죽은 아들이 변한 것이라 생각한 친할머니는 별안간 실신하고 만다. 모두들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는데 외할머니가 나서서 감나무를 칭칭 감고 있는 구렁이를 정성을 다해 달랜다. 구렁이는 마치 외할머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감나무에서 내려와 대밭으로 사라진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친할머니는 외할머니에 대한 미움을 거두고 화해한다. 그리고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난다. 마침내 길고 긴 장마가 그친다.
전쟁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음에도 전쟁의 참상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국군을 아들로 둔 외할머니와 빨치산 아들을 둔 친할머니의 대립을 통해 남한과 북한의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기다리던 아들은 끝내 돌아오지 않고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 소동이 벌어지지만 구렁이가 빨치산 삼촌이 달아났던 대밭으로 사라진다는 점은 암시적인 느낌을 준다. 윤흥길의 작품 <장마>는 비가 내리는 기간이 길고 지루했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념의 대립이 장마처럼 길고도 지루했다는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북태평양 기단과 오호츠크해 기단의 영향으로 전국이 장마 영향권에 들기 시작했다.
창문을 여니 거센 비가 내리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들이 비로 수렴되는 시간이다. 비의 주문이 시작된 것이다.... rainy spell..... /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