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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에 이르고자 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충동

완벽에 대한 반론 (The case against perfection)

완벽에 대한 반론 (The case against perfection)

저자 : 마이클 센델 출판사 : 와이즈베리


완벽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불온한 것일까?

인간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다. 10달을 모태의 자궁에 살아야 하며, 세상에 나와서도 다른 동물 아기에 비해 발달이 더디다. 돌 무렵이 되어야 비로소 걷기를 시작한다. 자신을 보호할 날카로운 뿔도, 추위를 견딜 복슬복슬한 털, 파충류처럼 단단한 피부 껍질 하나 없다. 보드랍고 연약한 몸.... 인간의 아기는 다른 동물의 아기보다 강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 아기는 생후 상당히 유의미한 급진적인 단계를 거치면서 뇌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 인류가 이룬 문명이란 것은 뇌 진화의 결과다.


뛰어나고 싶은 욕구와 가능하면 실수를 줄이려는 노력이 합쳐져 ‘완벽’이라는 목표를 만든다. 완벽의 ‘벽(璧)’은 원래 동그랗게 갈고닦은 옥(玉)을 가리키는 한자어인데, 이 벽(璧) 자를 쓴 완벽이라는 말에는 중국 조나라에 ‘화씨의 벽〔和氏之璧〕’이라는 유명한 보물 구슬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완벽’이라 함은 한 점의 흠집도 없이 훌륭한 옥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며 훌륭한 것을 그대로 무사히 보존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완벽의 개념은 “어떤 사물이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거나, 또는 일처리를 흠잡을 데 없이 완전하게 한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완벽의 기준은 개인차가 있게 마련이지만 사회통념상 ‘완벽’이라는 개념은 누구나 도달하고 싶은 종착지와 같을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왜 완벽에 대한 반론을 펴고 싶었을까? 완벽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완벽’이라 정해놓은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배타적으로 보게 만들었고, 완벽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질수록 더더욱 완벽에 이르는 것은 ‘신화’가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은 완벽에 이르기 위해 태생적인 조건을 넘어서 과학이 힘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인간이 이룬 문명은 인간적인 것, 적어도 인간의 내음을 풍기는 것이었다면 ‘완벽’을 향한 인간의 질주는 인간 이상의 것이 되기 위한 비인간적인 몸부림처럼 보인다.


이 책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승자독식 사회, 자연적인 능력에서 비롯된 경쟁이 아닌 유전공학의 힘을 빌려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현실이 머지않아 인류에게 재앙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유전공학의 발전은 질병 치료와 예방,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과 같은 긍정적 측면을 지님과 동시에 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인위 조작함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부정적인 측면을 지닌다. 유전공학을 이용하여 남보다 뛰어난 능력과 재능을 소유하려는 태도는 과연 옳은 것일까? 인간의 본성을 임의로 재설계하는 것은 어떤 문제를 초래할 수 있을까? 삶과 생명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할 진정한 가치와 미덕은 무엇인가? 샌델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제1부는 ‘강화의 윤리학’으로 유전공학 기술을 이용한 근육 강화, 신장 강화, 성별 선택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다. 우리가 강화하고자 하는 것들 기억, 신장, 성별... 유전적으로 남들보다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이들과 달리 그리하지 못한 이들에게 생명공학적 기술을 이용한 ‘강화’는 충분히 공정해 보인다. 그러나 유전적 강화와 복제, 유전공학 기술은 결과적으로 인간 존엄성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기에,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인간성을 어떻게 손상시키며 인간의 자유나 번영의 어떤 측면을 위협하는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제2부 생체공학적으로 설계된 운동선수에서는 스포츠의 이상을 노력으로 보아야 하는지 재능으로 보아야 하는지 묻고 있다. 유전공학으로 경기력이 강화된 운동선수의 진짜 문제는 자연적으로 타고난 재능을 계발하고 발휘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는 인간 활동으로서의 스포츠 경쟁을 오염시킨다는 데 있다.

계획성의 윤리와 생명공학의 힘은 선물로 주어진 재능의 윤리와 반대 지점에 놓여 있으며 유전학적 개입으로 인한 경기력 강화 기술들은 운동선수나 예술가의 천부적 재능과 능력의 의미를 훼손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제3부는 맞춤 아기 논쟁에서는 성과에 대한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에서 생명공학 기술로 아이의 능력을 강화하는 것은 과잉 양육이라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선물로 받음’(giftedness)의 윤리는 자녀 양육에서도 적용되는데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적 강화가 양육의 본질을 퇴색시킬 수 있다.

신학자 윌리엄 F. 메이는 “다른 어떤 인간관계 보다도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는 선택하지 않은 것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입양의 경우를 제외하고 부모와 자식은 선택의 문제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식 관계는 서로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메이의 설명에 따르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에는 ‘받아들이는 사랑’과 ‘변화시키는 사랑’의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한다. ‘받아들이는 것’과 ‘변화시키려는 것’은 수시로 충돌한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변화시키려는 어리석음을 늘 범하는 것이 부모이다. 자신의 부모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샌델은 생명공학 기술의 힘을 빌어 아이의 능력을 강화시키려는 것은 과잉 양육이며 이는 삶을 선물로 바라보는 관점을 놓친 체 인위적으로 과도하게 통제하려는 이상 심리 징후와 같다고 주장한다.


제4부 우생학의 어제와 오늘에서는 과거의 우생학과 자유시장 우생학, 자유주의 우생학 대해 다루고 있다. 하버마스는 자유주의 원칙인 자율성과 평등성을 위반한다는 측면에서 자녀를 선택하거나 자질을 강화하기 위한 유전학적 개입에 반대한다. 부모가 아이의 삶을 우생학적으로 설계하려는 순간부터 부모는 아이 삶에 대해 상호성이 성립될 수 없는 책임을 지게 된다. 부모의 설계가 아이 스스로 자신의 인생 계획을 선택할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에 대해 자유주의적 우생학 옹호자들은 자녀가 세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키거나 하루 종일 테니스 연습을 시킴으로써 세계적 피아니스트나 테니스 선수로 성공시킨 경우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묻는다.

하지만 우생학적 양육 방식은 정복하고 통제하려는 태도를 합리화하며 인간의 능력과 성취가 선물로 주어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가진 자유의 일부분이 자연적으로 주어진 능력과 끊임없이 교섭하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제5부는 정복과 선물에서는 질병치료용으로 유전학적 혁명이 일어났는데 그 기술이 우리의 능력과 성과를 강화하고 자녀를 설계하고 인간 본성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제한받지 않는 인간의 자유라는 관점에는 결함이 있으며 삶을 선물로 인정하는 태도를 사라지게 한다. 샌델은 유전공학으로 인해 유전적 제비뽑기의 결과를 무시하고 선택에만 중점을 두게 되면 인간의 능력이 주어진 선물이라는 개념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라 주장한다. 우리 자신을 공동 운명을 공유하는 존재로 여기는 관점도 사라지고 성공한 이들은 스스로 능력을 성취한 자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우생학적 교정이 필요한자라는 인식이 팽배할 것이다.


샌델은 유전적 강화에 대한 반대론을 펴면서 정복의 태도가 경외의 태도를 누르고 일방적 승리를 거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생명과 삶을 주어진 선물로 보는 인식을 되찾아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배아 윤리적 측면에서는 인간 개체 복제 금지, 연구실에서 배아 배양 시간에 대한 합당한 제한, 불임클리닉 영업의 의무 요건 강화, 난자와 정자의 상품화 제한, 특정 주체들이 줄기세포 라인을 독점하기 위한 줄기세포 은행 등의 방법을 활용하면 인간 생명의 악의적 이용을 막을 수 있다, 그리하면 인류 건강을 증진시키는 축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생명공학의 발전은 점점 가속도가 붙게 될 것이다. ‘완벽’이라는 조건으로 사회 전반에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완벽’을 소유하기 위해 유전공학 기술을 비윤리적으로 활용하게 되고 그로 인해 인간 본성을 침해당할 수 있다. 삶이 선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지나친 인위적 통제, 완벽에 대한 조작으로부터 우리 스스로가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센델의 말처럼 ‘프로메테우스적 충동’은 전염성이 있다. 유전공학적으로 강화하지 않은 채 ‘삶은 선물’이라는 것에만 주안점을 둔다면 그런 선택을 한 부모는 계기판을 보지 않고 맹목적 비행을 하려는 조종사와 같다는 비난을 받을지도 모른다.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 유전공학 기술이 가져다준 진보의 불 앞에서 우리는 더 완벽해질 수 있다는 환상 앞에서 갈등하고 있다. 날 것 그대로, 본디 그러한 채로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선물’이라 생각하며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과 조금이라도 나은 조건, 강화된 조건에서 더 나아 보이는 삶을 선택할 가능성을 갖고 싶은 열망 사이에서 흔들린다.

그러나 명백한 진실은 샌델의 말처럼 유전공학이 가져다 줄 프로메테우스적 충동은 우리 삶의 질을 조금도 높여주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우리는 더 완벽해지지 못하는 현실 앞에 좌절하고 더 강화하지 못하는 여건 앞에서 절망하고... 삶의 의미는 능력주의로 퇴색되는 현실 앞에 삶을 지속할 의욕마저 상실해버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상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다. 어느 누구도 세상에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의지대로 오지 않았다. 좋은 운명을 타고난 이는 운명의 제비뽑기를 잘한 것이라고 그리하지 못한 이는 끝없이 노력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샌델의 소크라테스적 질문 앞에 우리는 ‘완벽’에 대한 환상을 접어야 할 듯싶다. 완벽은 결코 완벽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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