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 문은 결국 당신을 위한 입구였습니다

프란츠 카프카 『법 앞에서』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는 법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시골 사내가 등장한다.

시골 사내는 법의 문 앞에서 문지기에게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고 애원하지만 문지기는 단호하게

“지금은 안된다.”라고 말한다. 사내가 문 안을 기웃거리자 문지기는 안으로 들어가고 싶으면 자신을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라고 한다. 다만 자신은 맨 끝자리 문지기에 불과하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문지기의 위력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큰소리로 말한다.

법이란 누구에게나 또한 언제라도 열려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골 사내는 문 앞에 앉아 무조건 기다리기를 선택한다. 그렇게 여러 해가 지났다. 문지기를 지치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해보기도 하고 마음을 얻기 위해 시골에서 가져온 선물까지 모두 이용해보았지만 허사였다.

심지어 시골 사내는 문지기의 모피 옷에 붙어있는 벼룩에게 까지 도움을 요청한다.


법의 문 앞에서 기다리던 시골 사내는 점점 더 늙어가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력도 나빠진다.

임박해오는 죽음이 느껴지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던져보지 않은 질문을 문지기에게 던진다.

“왜 나말고는 아무도 이 문 앞에 와서 안으로 들여보내 달라는 이가 없나요?”

문지기는 “여기는 당신 외에는 누구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없는 문, 이 문은 오직 당신을 위한 문입니다. 이제 입구를 폐쇄해야겠습니다.”

단 한 번도 문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고 기다리기만 한 사내는 행동하지 못하는 나약한 소시민의 전형이다.


‘카프카는 왜 제목을 ’ 법 앞에서‘라고 하였을까? 우리가 흔히 아는 법(法)은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 정의를 실현함을 직접 목적으로 하는 국가의 강제력을 수반하는 사회적 규범 또는 관습을 말한다.

이 책에 등장하는 ’ 법‘은 그 법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 법‘은 관습, 종교, 사회조직, 개인의 삶 등을 모두 포괄하여 우리가 살아가면서 통과해야 할 무언가 이다. 그리 생각하면 문지기는 우리 삶에서 통과해야 할 무언가를 방해하는 걸림돌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어떤 문 앞에 서있다.

그 문은 때론 지나치게 커 보이고 그 문은 사실은 열려 있는데도 닫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골 사내는 적극적으로 문지기를 통과해 지나가려는 대신 소극적인 행동을 보인다. 애원, 부탁, 선물 공세... 심지어 문지기가 아닌 문지기의 모피옷에 달라붙어 있는 벼룩에게까지...

아주 잠깐 문 안을 들여다보기는 했지만 들어갈수록 다른 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은 보기만 해도 무서울 거라는 소리에 질려 들어가려는 마음조차 접는다.

문 앞의 시골 사내... 그는 평생을 자신이 삶을 제대로 살아보지 못하고 문 앞에서 소모해버렸다.

삶을 관통하는 일은 늘 어렵다. ‘제대로’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


시골 사내의 삶이나 나의 삶이나 별로 다르지 않다. 카프카는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법의 문이라 하였지만.... 법의 문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말엔 공감하지 않는다.

문지기의 마지막 대답 “여기는 당신 외에는 누구도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이 문은 오직 당신을 위한 문입니다.”

사골 사내가 아닌 어느 누구에게도 입장 허가를 내줄 수 없는 문이라면 문지기는 대체 누구를 지키기 위해 그곳에 있었을까? 사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불허하기 위해서였을까?

또다시 문지기의 첫 번째 대답을 상기해보면

들여보내 달라는 시골 사내에게 “지금은 안된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안되지만 언젠가는 된다는 의미다. 입장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언젠가’는 대체 언제란 말일까? 문지기가 말하는 지금은 안된다는 ‘지금’과 시골 사내가 들어가고 싶은 ‘지금’은 왜 일치하지 않은 것일까?

스토리로만 한 줄로 압축하면 ‘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시골 사내가 문지기의 거절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밖에서 기다리다 늙어버렸다.'는 아주 짧은 이야기지만 주제는 묵직하다.


나는 늘 카프카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묵직해진다.

그가 살아온 삶의 조각들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어서 일까.

작가가 어떤 작품을 탄생시켰을 때 독자는 과연 작가의 창작 의도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을까? 적어도 작가가 하려는 말을 독자는 어느 정도나 알아챌 수 있을까?

특히나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은 독자에게는 녹록지 않다.

통과해야 할 무언가가 눈앞에 있음에도... 그 앞에서 오늘도 우물쭈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통과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는 사이에 달력의 숫자는 8월을 가리키고 있다. 두려운 여름이다. /려원

keyword
작가의 이전글완벽에 이르고자 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충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