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이유는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여행의 이유는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어딘가로 떠나오면 규칙적인 일상에 균열이 생긴다.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당위에서 벗어나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다. 자유로움은 일상의 삶에 아름다운 균열을 일으킨다
여행의 시작은 여행가방을 싸는 일부터 시작하여 다시 돌아와 여행가방 안의 물건들을 제 위치로 정리하는 일로 마무리된다.
다락 어딘가에 낡은 여행가방이 있지만 새빨간 16인치 여행가방을 새로 샀다.
강렬한 빨강에 끌려서다. 코로나 이후 ‘여행’이란 단어는 금기어가 되어버린 듯싶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코로나 시대라 얼마나 자주 새빨간 여행 가방을 꺼내 쓸 수 있을까?
겨울 휴가를 쓰는 직장인들은 드물다. 대개는 막판에 몰아서, 어쩔 수 없이 연가를 내지만 꼭 여행을 가기 위해서는 아니다.
누군가 말한다. 이토록 더운 날, 왜 그리 휴가를 가려고 안달을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고.. 대체 무엇 때문일까. 몇 년 전만 해도 휴가철 여름 한 낮 도로는 주차장 같았다. 속초를 향해가던 때, 지루한 전진... 차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이글거리는 도로 위 지루하고 나른한 여행이었다.
한 여름의 강렬한 태양. 8월이 휴가의 정점이다.
내리쬐는 태양을 온몸에 맞으며 여름 바다를 보고 싶어 바다를 향한다.
해마다 바다는 늘 거기 그대로 있다.
바닷가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간다. 덧없는 반복에 물놀이하는 이들은 몸을 맡긴다. 여름이라고 바다가 특별할 리 없다. 봄바다, 가을바다, 겨울바다.... 우리가 굳이 여름 바다에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바다 안으로 들어가 바다를 온몸으로 만질 수 있는 계절이기 때문일 것이다. 계곡물이든, 바닷물이든...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나는 바다를 눈에만 담아온다. 눈으로 바다를 만지고 돌아온다.
섬의 햇살은 따갑다. 햇살 아래 단 5분도 버티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섬사람들은 한 여름에도 긴 팔을 입고 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기 전 이른 아침, 바다로 이어지는 마을 길을 걷는다. 구불구불 미로 같다. 벌써 어떤 여인이 새빨간 고추를 햇살 아래 건조하는 중이다. 해풍에 실려오는 한 여름의 열기가 빨간 고추에 묻어있다.
여행의 이유... 많은 작가들이 같은 제목으로 여행에 대한 책을 썼다. 여행에 이유가 있을까. 여행에는 아무 이유가 없다. 굳이 이유를 찾기 위해서라면 무사히 잘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일탈이라고 보기엔 지나치게 짧은 시간, 한 여름의 태양 아래 축 늘어진 8월의 나뭇잎들, 진초록들, 메마른 잎들.... 햇살 아래 지쳐 보이는 풀들, 나무들을 보기 위해서가 또 다른 이유가 될 수도 있겠다.
안전 안내 문자의 알림음에 익숙한 날들이라 여행을 떠나는 것도 부담스럽다.
오랜 여행을 계획할 수 없어 여행가방 가득 떠남에 대한 기대만을 담는다.
끝내 새빨간 여행가방은 사용하지도 못하고 낡은 여행가방에 대충대충 짐을 아주 간단히 챙겼다.
새빨간 여행가방은 여행이 여행다워지는 날이 오면 비로소 사용하게 될 것이다.
여행은 떠남과 돌아옴 사이에만 존재한다. 일상으로 돌아오는 날, 가방은 다시 가방의 일상으로 복귀한다. 모처럼 불룩해진 것들을 토해내고 다락 깊은 곳 어딘가에 누워있게 될 여행가방. 몸을 웅크린 채 올여름의 바다 내음을 되새김하며 일 년 뒤의 여름을 기다릴 것이다.
여행의 이유는 일상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이고,
다시 읽고 싶었던 책을 자유롭게 완독 하기 위해서이고,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여행 가방이 본래의 용도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아모즈 오즈의 『나의 미카엘』,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야』
그리고 안규철의 『사물의 뒷모습』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아주 짧은 여행길에 함께 했던 책들이다. 다시 일상의 시작... 여전히 분주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집중 호우가 내리더니 이젠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하다. 달력을 보니 '입추'라고 적혀있다. 가을로 들어가는 길목인 것이다. /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