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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한 악'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라쇼몬(羅生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라쇼몬(羅生門)

악의 번식. 인간 내부에 도사리는 악. 잠복상태다. 도덕으로 무장한 사람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들의 도덕에 틈이 생길 때 악은 발화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 ‘라쇼몬’ (나생문)은 1900년대. 일본 헤이안 시대의 수도 교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의 교토는 화재, 지진, 기근이 심각했고 사람들이 삶은 궁핍하다 못해 참담해서 사찰의 기둥을 베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연고지 없는 시신들을 라쇼몬에 버려두고 갔다. 눈을 뜬 시체, 눈을 감은 시체, 입을 벌린 시체, 머리가 긴 시체, 대머리 시체, 벌거벗은 시체, 늙은 시체, 젊은 시체...


작품의 주인공 ‘하인’은 (이름도 없이 그냥 하인이다) 4-5일 전 주인집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다. 추적추적 비는 내리고 하인은 라쇼몬 아래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는 갈등. 어떻게든 해 볼 도리가 없는 현실, 하인의 머릿속에는 온통 ‘없다면’으로 가득 차 있다. ‘없다면’의 다음 말은 ‘도둑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이다. 하지만 그것을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하인’에게 남아있는 약간의 도덕심 때문이다.

선과 악의 갈등 사이에 ‘없다면’이 존재한다. 달리 살 도리가 없다면, 오늘 잠 잘 곳이 없다면, 먹을 것이 없다면, 일거리가 없다면.... ‘없다면’은 하인을 시시각각 고통스럽게 만든다.


하인의 내적 갈등이 ‘선’에서 ‘악’으로 바뀐 것은 2층에서 만난 자주색 옷을 입은 늙은 노파 때문이다. 몸집이 작고 깡마른 노파는 관솔불을 켜고 시신 사이를 더듬고 있었다.

머리긴 여자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던 노파에게 하인은 무엇을 하는지를 묻는다.

“가발을 만들 거야”

하인의 마음에 분노가 솟구친다.

“ 이 죽은 여자는 살아 생전에 다데와키 부대에 뱀을 말린 것을 생선이라고 사기 쳐서 팔아먹었지. 그 여자도 먹고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잖아. 나도 마찬가지고...”

죽은 여자 또한 시신의 머리를 뽑아 생계를 연명하려는 노파를 이해할 것이라는 말까지 덧붙인다.

노파의 말을 듣는 동안 하인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것이 꿈틀거리며 솟아난다. 묘한 용기 같은 것, 뻔뻔함 같은 것, 잠재된 악이 스멀거리고 올라온다.

하인은 허리춤의 칼을 만지작 거린다.

“좋아, 네가 너의 껍질을 벗겨가도 넌 나를 원망하지 않겠지”



<하인은 벼락 치듯이 재빨리 노파의 옷을 벗겼다. 그러고는 발목을 붙잡고 매달리는 노파를 거칠게 시체 위로 걷어차 버렸다. 사닥다리까지는 다섯 걸음 안 팎이었다. 하인은 노파에게서 뺏은 자주색 옷을 옆구리에 끼고 눈 깜짝할 사이에 가파른 사닥다리에서 땅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잠시 죽은 듯이 엎드려 있던 노파가 시체들 사이에서 벌거벗은 몸을 일으킨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노파는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아직도 타고 있는 불빛에 의지해 사닥다리까지 기어갔다. 그리고 짧은 머리카락을 거꾸로 내려뜨리고 다락 아래를 살폈다. 밖에는 다만 칠흑같이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하인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라쇼몬 원작 인용


라쇼몬 안으로 들어가기 전의 하인과 라쇼몬 밖으로 나오는 하인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하인이 라쇼몬으로 들어가려는 이유는 오직 비는 오고 잠을 잘 곳이 마땅치 않아서였지만 라쇼몬 안의 상황은 하인 머릿속에 맴돌던 ‘~이 없다면’을 강화시키는 악의 기폭제가 되고 말았다.

~이 없다면 뱀 고기를 생선이라 둔갑시켜 팔아먹을 수도 있는 일이고

~이 없다면 죽은 시체의 머리카락 따위는 얼마든지 뽑아서 팔아먹을 수 있는 일이고

~이 없다면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고 다니는 노파의 자주색 옷 따위는 얼마든 빼앗을 수 있는 일이고....

.~이 없다면 라쇼몬 밖으로 나가서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것이고...

~이 없는 세상을 탓해야지... 해고당한 자신을 탓해서는 안된다는 묘한 오기마저 생겨났다.

하인은 어쩔 수 없었다고, 현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악을 정당화한다.

죽은 여자, 노파, 하인으로 이어지는 악의 고리. 머리 긴 여자는 이미 죽어서 더 이상 악을 저지를 수 없다. 노파는 노쇠하여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인은 아직 젊고 하인은 이제 막 악의 탈콤한 맛을 알아버렸다


신부님 강론 중에 Present는 선물이면서 현재...

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며 하느님께서 선물을 주실 때 ‘고통’이라는 포장지를 쓰신다고 하셨다. 귀한 선물, 간절히 원하던 선물을 싼 포장지가 ‘고통'이라면... 선뜻 그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아무리 원하던 선물이라 해도 겹겹의 ’ 고통‘에 싸인 선물을 받기는 두렵다.

귀한 것은 쉽게 얻을 수 없다는 의미와 귀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인내와 시련을 동반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 혹은 고통 그 자체가 인생의 ‘선물’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늘 드는 의문이 어차피 주실 선물이면 보드랍고 좋고 향기나는 포장지로 싸셔도 되지 않았을까. 굳이 선물을 주시면서까지 우리의 의지를 시험하려 하시는가 였다. 대개는 그 선물의 정수에 이르기도 전에 고통 앞에 항복하고 만다. 고통은 사람을 단련시키기도 하지만 사람을 두 번다시 재기할 수 없을 정도의 절망에 빠트리기도 한다.


선물을 받기 위해 고통의 포장지를 여는 일....‘선’은 때론 고통의 얼굴을 하고 있다. ‘선’해지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지닌 것들을 버려야 하고 내려놓아야 하고 유혹은 이겨야 한다.

하인은 고통의 포장지를 여는 대신 쉽고 편한 방법을 택했다.

‘악’이라는 이름의 가장 빠르고 편한 방법. 칼을 휘두르면 해결될 수 있는 손 쉬운 방법.

라쇼몬 밖으로 나간 하인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인은 라쇼몬 밖의 세상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악을 자행할 것이다.

그를 다시 마주쳐도 아무도 그를 예전의 ‘하인’으로 인식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안의 악을 누르고 있는 힘. 그 힘의 균열이 오면 악은 언제든 악의 의도대로 분출되고 말 것이다.

<라쇼몬>은 예술과 현실, 삶과 죽음 사이에 고민하다 35세의 나이에 신경쇠약으로 자살해버린 아쿠타카와 류노스케가 전하고 싶은 인간의 모순적 심리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살기 위한 악’이라 해도 그 ‘악’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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