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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무언가를 구하는 것

아니 에르노를 만나는 시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무언가를 구하는 것

1989년에 하버드 대학교의 연구진은 기발한 실험을 수행했다.

그들은 70세 이상의 자원자들을 외진 시골의 수련원으로 데려가서 일주일 동안 마치 1959년인 것처럼 행동하라고 요구했다. 그 수련원에서는 1959년의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그 수련원에서 10일간 지낸 후에 과학자들은 생리학적 수치를 다시 측정했는데, 생리학적으로 몇 년 더 젊어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원자들 중에는 정신적, 생리학적으로 무려 25년이나 더 젊어진 사람도 있었다.

데이비드 해밀턴, <마음이 몸을 치료한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인생의 어느 한 시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어느 시기로 돌아갈 것인가?

만일 거기서부터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 시작으로 인하여 나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면 나는 지금보다 행복할까?


하버드대의 과거 어느 시점으로의 여행은 어쩌면 치매 환자들이 특정 시기의 기억에만 집착하거나 특정 시기의 기억만 소실된 상태와 비슷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대와 상황은 변했는데 늘 해결되지 않는 혹은 자신에게 가장 인상적인 한 시점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1959년 스타일의 집에서 그 시대에 유행하는 옷과 잡지, 뉴스를 보며 그 시대의 간식거리를 먹고 그 시대에 있었던 이슈들을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몸은 이미 그 시점으로부터 30년이 훌쩍 넘어섰지만 갑자기 30년 전으로 돌아간 환경에서 인간의 뇌에는 어떤 유의미한 반응이 새겨질 것인가.

생물학적 나이를 거부하기는 어렵다. 얼굴 성형을 하고 전신성형을 하더라도 주민등록상에 명시된 나이마저 성형할 수는 없다. 흔히 10대 20대.... 70대처럼 10년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은 그 세대가 지닌 모든 것들을 포괄할 수 있을까? 10년을 기준으로 세대를 나누는 것은 재고해 볼 문제다.


인생의 어느 시기를 지금 관통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바라보는 하늘이 터널 속에서 갈망하는 하늘인지, 터널을 거쳐 온 위 바라보는 하늘인지...

사실 '관통'이라는 말을 하기도 어렵다. 전지전능한 누군가가 위에서 내 삶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지금 당신은.... 를 관통하는 중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어느 순간에 있는지 조차 알지 못하는 나는 내 삶에 ‘관통’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모호하다.

아니 에르노의 소설 『세월』은 1941년에서 2006년의 시간을 한 여성의 시각으로, 또 개인의 역사에 공동의 기억을 투영하여 담은 작품으로.'마르그리트 뒤라스 상', '프랑수아즈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램 독자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아니 에르노 개인의 기억에 바탕을 둔 개인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같은 시절을 거쳐온 사람들의 공동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녀의 65년이라는 시간을 기록한 『세월』의 첫 문장은

“모든 장면들은 사라질 것이다”이다.

세월의 흔적 속 한 여자의 일생이 담겨있다. 턱받이를 한 아기에서 시작된 한 장의 사진, 날카롭고 예민한 사춘기 소녀, 성적인 열망을 감추지 않는 자유분방한 여자.... 그리고 세월이 관통해버린 여자. 바칼로레아를 통과한 모범생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모범생은 아니다.

아니 에르노의 글투는 불편하다. 읽는 이들을 염두에 두지 않은 날것의 글.

어쩌면 나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읽는 게 아니라 '아니 에르노'를 읽고 있는지 모른다.

빈 옷장, 단순한 열정, 사진의 용도 그리고 세월. 그녀의 책 '세월'을 읽다가 다시 그녀의 다른 책들로 돌아가 특정 시기에 집중된 기록들을 퍼즐 조각 맞추듯 다시 확인하고 '세월'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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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그녀의 기록은 “모두가 해야 하는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선과 악을 구별할 줄 알았고 자신을 바라보는 타인의 눈 속에서 가치를 읽을 수 있었다. 공립, 사립 할 것 없이 학교는 비슷했다. 침묵 속에 불변의 지식을 전하는, 질서와 위계를 존중하며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장소. 블라우스를 입는 것, 종탑 앞에 줄을 서는 것... 우리는 엄격한 규율에 제약을 받으면서 갇혀있는 것을 특권으로 알고 자랑스럽게 여겼다.”라고 적고 있다.

사춘기의 그녀는 극장에서 길, 이탈자, 오만한 자들, 장마, 카디스의 딸, 금지됐지만 보고 싶었던 영화, 자격보다 욕구가 우선인 영화를 본다. 학교에서 쌓아온 지식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어떤 일들의 흔적과 어떤 사건들을 훗날에 그것들을 연상시키는 문장을 들었을 때 ‘기억한다’고 말하게 될 어떤 것들을 생각한다.

바칼로레아 이후 그녀의 삶은 안갯속에 끝없이 펼쳐진 힘겹게 올라가야 할 계단이다. 16살이 행동하고 존재하는데 필요로 하는 기억이 가난 속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들을 컬러가 있는 무성영화로 본다.

성적인 경험들은 남학생들과 달리 여학생들에게는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부자들은 스위스로, 그렇지 않은 이는 전문가가 아닌 낯선 여자가 냄비에서 뜨거운 금속관을 꺼내는 주방으로, 시몬 드 보부아르를 읽으며 자궁을 가졌다는 불행을 다시 확인한다. 여학생들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시간, 준비해야 할 발표 또는 방학과 같은 평범한 시간과 변덕스럽고 위협적이며 언제는 멈출 수도 있는 피가 소멸하는 시간을 살았다.


그녀는 어느 순간, 남편, 아이, 집, 그녀가 원했던 것들을 가지고 지금 여기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노르망디의 작은 도시에 있는 부모님의 모습을 불현듯 떠올린다. 밤에 성체 강복식을 가려고 블라우스를 벗던 어머니와 어깨에 삽을 지고 정원을 올라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여전히 존재하는 느린 세계와 앞으로만 나아가는 그녀가 속한 모던하고 교양 있는 세계, 절대 만날 수 없는 두 세계를.

세상에 일어나는 일과 그녀에게 일어나는 일 사이에는 어떠한 교차점도 없다. 두 개의 평행선이 이어진다. 하나는 추상적인 하나는 지나치게 구체적인 정보로.

어느 순간 그녀는 나이를 느끼지 못한다. 분명 젊은 여성으로서 더 나이 든 여성을 향한 교만과 폐경기 여성을 향한 거만함을 품고 있다. 아직 젊은 그녀는 자신이 늙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도 없다. 일반적인 윤리의 언어를 버리고 ‘욕구불만과 ‘만족감’ 사이를 오가고 세상을 보는 ‘느긋함’을 배우고 세상에 대한 확신과 타인에 대한 무관심을 적절히 섞는 것에 익숙해진다. 확실한 직업과 돈이 반드시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아이들은 그런 행복을 누리기를 바랐다.

이혼 후 두 아들과 살며 가구와 집을 정리하면서 물질의 상실과 자유 속에 산다. 돌아보면 그녀에게 결혼은 막간극이었던 것처럼 이제 그녀는 다시 삶을 욕망할 자유를 얻은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 안에는 남편과의 공동생활의 흔적과 바흐와 신성한 음악, 아침의 오렌지 주스처럼 남편의 취향이 몸에 배어있다. 다시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는가라고 스스로에게 묻지만 부질없는 질문임을 안다.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마주하는 여인들의 모습, 그 여인들 속에 뒤섞인 그녀. 러시아 인형처럼 끼워 맞춘 것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느낀다.


어른이 된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들을 결속하는 것은 피도 유전자도 아닌 다만 함께 보낸 수천 번의 나날들, 말과 몸짓, 음식, 차를 타고 달린 거리들, 의식하지 못하지만 함께였던 흔적들의 한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과 이미 일어난 일들 사이 그 어디쯤에 멈춰있다. 개인의 것이지만 세대의 변화가 녹아있는 삶, 역사적 시간의 흐름과 사물들, 생각들, 관습들의 변화와 한 여자의 내면 변화를 동시에 표현할 수 있을까. 고독이란 시를 썼던 스무 살의 일시 정지된 순간들의 자아를 동시에 만나게 할 수 있을까,‘나’와 ‘그녀 ’ 사이의 간극. ‘나’ 안에는 너무도 확고부동한 것들, 편협하고 숨 막히는 무언가가 있고 ‘그녀’ 안에는 너무 많은 외재성과 거리감이 있다.

이미 어른인 아들들을 만나는 일이 뜸해지면서 그녀는 이따금씩만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성적인 용도가 아닌 위로가 될 수 있는 애인을 만나는 일, 무의미한 사건들을 누군가와 대화하고 언어로 표출하는 일.

퇴직을 앞둔 그녀는 수업, 책에 관한 메모, 수업 자료들을 버려가고 있다. 현대화 속에 인터넷에 키워드 하나만 입력하면 수천 개의 사이트가 밀려오는 정보의 홍수 속에 자꾸만 빨려 들어가는 것, 찾고 싶지 않은 것, 찾으려 한 의도조차 없는 정보들에 빨려 들어간다.

뒤섞인 개념 속에서 오직 자신 만을 위한 문장,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외치며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문장을 찾아내기란 갈수록 어려워졌다. 모니터 속 경쾌하고 빠른 마우스 클릭은 시간의 척도가 되었다. 주체가 부재하는 객체들 세계의 현실 속에서 변화했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을 모두 잃었고 같은 시기에 첫째 아들이 배우자의 배속에 아이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이 세상에서 자신이 빠르게, 지체 없이 대체된다는 사실이...... 아니 에르노의 작품 『세월』 일부 발췌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대에 이 땅 위에 살다 간 그녀의 행적을 이루고 있는 기간이 아니라 그녀를 관통한 그 시간, 그녀가 살아있을 때만 기록할 수 있는 그 세상이다.

아니 에르노의 『세월』 맨 마지막 문장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무언가를 구하는 것’으로 끝난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무언가를 구하려는 것, '아니 에르노의 작품'이 아닌 '아니 에르노'를 읽기 위해 그녀의 작품 여러 권을 동시에 넘나들었다. 빈 옷장, 사진의 용도, 단순한 열정...

『단순한 열정』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사랑을 다룬 작품으로 그 사랑이 끝난 후 그 사랑에 대한 기억들을 더듬어간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 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약속 사건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그의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가급적 외출을 하지 않았고. 행여 전화벨 소리를 못 들을 까 봐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를 사용조차 피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돌아보면 삶은 지극히 단순한 것들의 반복임을 깨닫는다. 지극히 단순한 열정의 반복, 삶에 대한 것이든, 사람에 대한 것이든.,,, 사랑에만 한정되지 않은 열정의 반복이다.


그녀의 또 다른 작품 『사진의 용도』는 아니 에르노와 그녀의 연인인 마크 마리가 함께 사랑을 나눈 후 어질러진 풍경을 사진으로 찍고 사진 위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기록한 책이다.

행위와 육체가 자취를 감추고 난 후 그곳에 남겨진 잔해들을 통해 사랑의 과정을 복기하는 일. 몸짓들이 남긴 폐허를 사진 속에서 알아차리게 한다. 사진은 그들이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사적인 행위들을 기록하는 사적인 물건들이 사진 속에 온전히 존재한다. 그녀의 말처럼 제멋대로 찍힌 사진 속 사물들은 전혀 외설스럽지 않다.


마크 마리와 아니 에르노가 사진으로 남긴 사물들의 가록은 조르쥬 바타유의 말처럼 “ 에로티즘은 죽음 속까지 파고드는 생(生) 임”을 보여주려는 의도인지도 모른다.

“ 인식하지 못한 채 잊고 있던 몸짓과 움직임 낯선 법칙을 따라 니트, 스타킹, 신발 같은 요소들이 예측할 수 없는 늘 새로운 구성을 만들었다. ”

“몇 주가 지나고 사진들이 쌓였다. 즉흥적인 제스처, 사진을 찍는 행위는 의식이 되었다. 그러나 항상 내 물건을 가져올 때 그 조화로운 형태가 파고 되는 순간에는 성스러운 장소의 유물을 더럽히는 것처럼 매번 내 가슴이 죄어들었다.”

아니 에르노는 그가 탐스럽고 잘 어울린다고 칭찬한 머리가 가발임을 알려주고 항암치료로 인해 가슴에 호스를 차고 있는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보여준다. 그녀는 호텔방을 공간과 시간의 이중적인 일회성으로 사랑의 고통을 가장 잘 느끼게 하는 장소라고 말한다. 호텔은 사물들이 의미를 갖는 곳이 아니니까. 누구에게든 누구의 사물이 될 수 있는 곳이니까. 그곳에서 나누는 사랑이나 그곳에서 맞이하는 죽음이나 일회적인 느낌이 들 거라고.....


그녀의 글들은 그녀 삶의 파편들이다. 버려지는 파편들이 아니라 파편 자체로서도 유의미한 파편들이다. 마크는 그녀에게 “당신은 글을 쓰기 위해 암에 걸린 거야.”라고 말한다. 사진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어느 정도 그의 말에 동의하기 시작한다. 사진이 보여주는 글. 사진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모든 것들.. 글이든 사진이든 지나간 것들을 붙잡아 두는 점에서는 같다.

아니 에르노는 이제 “암에 걸렸다”와 “암에 걸렸었다”의 사이에 있다.

현존하는 모든 기술로 몸 구석구석을 더듬는 수많은 검사와 촬영. 검사할 때마다 무엇을 ‘더’ 찾아내게 될까 두렵다. 하지만 지금은 “걸렸었다 ‘라는 표현을 쓸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녀의 작품 『사진의 용도』는 덧없는 것들을 붙잡아두는 용도이다. 사랑도 이별도 삶도 어찌 보면 지나가는 것들이다. 지나가는 것들을 피사체로 붙잡아 두는 것. 한 장의 사진 안에, 사랑이, 삶이, 사람이, 몸짓이, 언어가 고스란히 존재한다. 죽음의 속까지 파고 되는 생(生)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의 흔적이다.


2021년의 여름.... 올여름은 무엇을 소망하게 될까?

여전히 마스크로 감춘 얼굴, 눈으로만 바라보는 세상. 백신, 코로나, 더위, 여름, 세월, 옷장, 낡아감, 단순함, 사진, 기록, 글, 키보드, 씀, 한 낮, 무더위, 그림자, 생의 전진, 초록, 직립, 해야 할 일, 생각들, 순서와 방향,

길을 찾지 못하고 빙빙 같은 장소를 도는 것 같은 암담함, 어떤 지루함과 어떤 조급함 사이... 두려움과 설렘들이 공존하는 시간이다.

“아니 에르노”라는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기록을 읽기 좋은 여름이다.

덧없는 세월 앞에 나는 또 어떤 단순한 열정을 반복해야만 하는 것일까.

매미가 일제히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또 7월의 한 복판에 남겨졌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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