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생의 어딘가를 향한 무한 전진은
거룩하다

풀의 투쟁

보도블록 틈 사이로 연초록 풀이 솟아 있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은 반드시 크고 강력한 것이 아니다.

부서질 듯 연약한 그러나 고독한 종교와도 같은 직립.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 분명 인간이 이름 붙이지 않았지만 저마다의 이름은 있을 것이지만

‘풀’이라 부르는 것들. 틈과 틈 사이, 뿌리를 뻗어가며 존재 증명 투쟁 중이다.

화분처럼 보이는 거대한 회색 돌 사이, 동그란 구멍으로 고개 내민 풀꽃. 어디서 날아와 자리 잡은 것일까?

20210715_093205.jpg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지도 모를 가장 연약한 풀 앞에서 김수영의 시 <풀>을 생각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고 더 빨리 일어나는 풀.

날이 흐리고 발목까지 발밑까지 누워도...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먼저 일어나고 ‘

늦게 울어도 먼저 웃는 풀..... 김수영의 시에 등장하는 바람과 풀의 이미지는 아닐지라도 세상 어디든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 풀’들에게 눕고 울고 웃는 일은 중요하다.


회색 동그라미 안의 풀은 정지되어 있고 인간의 눈으로는 안정되어 보이지만 가두어진 경계 내에서 생존 투쟁 중이다. 풀은 결코 연약하지 않다. 발밑까지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테니까.

또다시 멈춰 서서 풀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아침 햇살이 만들어낸 이름 모를 풀들의 그림자를 찍는다. 작은 풀이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다. 빛이 만들어 낸 그림자는 사물의 본질을 왜곡하기도

하지만 풀의 그림자는 아름답게만 보인다.

20210715_093419.jpg

화려하고 예쁘지 않아도. 시선을 잡아끄는 아름다움은 한 여름의 햇살 아래... 시멘트 틈과 틈 사이 얼굴을 내미는 연초록의 당당함에 있다. 아름다움의 근원은 아무도 자세히 보는 이 없어도. 그 작은 틈에서 자신만의 하늘을 이고 자신만의 우주를 세우는 거룩한 담대함에 있다.

20210715_093516.jpg

보도블럭 틈 사이 자리잡은 '풀'의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풀은 긴 그림자를 끌고 전진하고 있다.

회색 틈을 뚫고 ... 직립한 채로........ 생의 어딘가를 향한 무한 전진은 거룩하다. / 려원

keyword
작가의 이전글검은 회색 연기를 내뿜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