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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서시 >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어제까지도 여름이(햄스터)가 치즈를 달라고 졸랐다. 햄스터는 원래 커다란 동굴 안에 서식하는 종이라 몸집은 작아도 활동 공간은 넓어야 한다고 했다. 마트의 좁은 우리 속에 수 십 마리가 엉겨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은가 혼자 생각했지만 좁은 우리 속에 햄스터를 살게 하는 것이 늘 미안한 마음이었다.

햄스터들도 사람처럼 단 한 마리도 똑같지 않다. 생김새, 습성, 행동.... 정글리안 종이든, 푸딩 종이든.. 털 색깔도 차이가 있다. 노란빛이 도는 흰색, 갈색 빛이 강한 흰색... 큰 눈과 작은 눈, 날카로워 보이는 눈과 동그란 눈, 친숙한 성격, 잘 다가오지도 않는 성격, 사나운 성격, 유순한 성격, 쳇바퀴를 잘 도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나 햄스터나 한 여름을 나기란 힘든 일인가 보다. 어르신들이 한 여름을 견뎌내기 힘들어하시듯 2년을 넘긴 햄스터 여름이에게도 올여름은 유독 버티기 힘든 시기였나 보다.

그래도 물을 마시고 위층과 아래층을 번갈아 돌아다니고... 치즈와 견과류를 탐하던 어느 여름날의 여름이었다.


바쁜 날이었다.... 주로 아침에 햄스터 우리를 들여다보는데 그날은 햄스터 여름이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하루를 보냈다. 먹이통에 먹이가 가득 채워져 있으니 별다른걱정은 하지 않았다.

한가해진 밤 시간 치즈를 꺼내 놓고 여름이를 부른다.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름이가 살던 우리를 살며시 들여다본다.

여름이는 오늘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시간대에 세상을 떠났던 모양이다.

마지막까지도 먹이통에 고개를 대고 있는 모습이 가슴을 후벼 팠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무엇이든 먹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우연히 고개가 먹이통을 향한 채 죽음을 맞은 것일까...

삶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마지막 가는 길 고통을 잊기 위함이었을까.


햄스터 우리를 정리한다. 이제는 다시 햄스터를 사지 않을 생각이다. 빈 햄스터 우리를 보면 마음이 안 좋아 꼭 한 마리씩이라도 다시 데려왔지만... 벌써 여러 해 햄스터들과의 이별을 하다 보니 이제는 그 받아들임의 순간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죽음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젊은 날의 내가 생각하던 죽음과 더 세월이 흐른 지금 생각하는 죽음은 차원이 다르다. 아마도 앞으로 죽음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는 더 달라질 것이다.

햄스터의 죽음 앞에 윤동주의 <서시>를 생각한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생명 있는 것은 모두 죽어가게 마련이다...

손바닥보다 작은 햄스터의 죽음에 마음이 아리다.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

세상에 우연히 온 생명... 그리고 또 우연히 어디론가 떠난다.

그날과 그 시간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알 수 없다.


삶과 죽음은 동시에 같은 얼굴이다. 삶이 괴롭거든 대학병원 중환자실 앞에 가서 한 시간만 앉아있다 보면 아무리 힘든 삶도 죽음보다는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살아야만 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당위가 버거운 날 암병동 대기실에 가면 살아야 하는 일, 살 수 있다는 일이 얼마나 축복인지 새삼 느낄 수 있다

암병원 앞에 모자 가게가 왜 그리도 많은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곳에 오는 여인들이 젊거나 나이 들었거나 한결 같이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궁금했는데 항암치료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알고... 가슴이 시렸다. 머리털이 없는 여인들.... 머리에 헤어 오일, 영양제도 왁스도.. 헤어 매니큐어도 염색도 파마도...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여인들....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여인이고 싶기에 화사한 모자를 고른다.



모든 죽어가는 것.... 아주 작은 햄스터의 죽음 앞에 나는 모든 죽어버린 사람들을 소환한다. 내 안에서 어느 정도 무뎌진 죽음에 대한 기억들을 다시 끌어내고 있다.

나의 20대. 할머니와 아버지의 죽음... 할머니는 여든이 넘으셨으니 그 당시로서는 수를 누리신 셈이지만 50 중반에 접어든 아버지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다행인 것은 그나마 할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그 이듬해 아버지가 투병생활을 마감하셨다는 사실이다.

봄의 후각.... 프리지어 향기 가득한 그 봄날을 죽음의 냄새로 각인하는 것은 아버지가 입원해있던 회색 병실의 샛노란 프리지어 때문이다.

3월이었다. 봄이 시작되던 때... 찬바람이 코 끝에 스치었다. 아버지의 봉분에 심어진 잔디의 싱그러운 연둣빛은 생명의 상실을 더 강하게 느끼게 했다. 노랑과 연두의 봄... 약동의 봄이 아닌 상실과 소멸의 봄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죽음의 시간이 오게 마련이다.

코로나로 죽어가는 사람들, 코로나를 예방하기 위해 백신을 맞았지만 이상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들,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은 사람들.... 안타까운 사연들이 연일 뉴스에 오른다. 안타까움에 국민청원을 한다.

남의 일 같지 않다. 두려움이 일상이 되어가는 듯하다.

성실히 묵묵히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들...

특별히 죄를 지은 것도, 남에게 피해를 준 일도 없지만 죽음이란 왜 그리 비정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먹이 통에 고개를 반쯤 집어넣고 최후를 맞은 여름이... 다음 생에는 좀 더 아름다운 생을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마트의 좁은 햄스터 우리에서 마주치지 않기를....

다음 생에서 나는 또 어떤 모습으로 존재할지 알지 못한다. 바람이 되어버리는 게 나을까. 형체없는 바람들..

티베트 속담에 “눈을 뜬 다음 날이 내일일지 다음 생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라고 했다.

눈을 뜬 오늘 아침은 다행히도 다음 생은 아니었다.

살아야 하는.... 그리고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맹렬한 삶의 시간이다. /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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