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창을 바라보는 일이고 어딘가 있을 창을 찾아 떠나는 방랑이라는 생각을 한다. 창이란 결국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창’ 이어야 함을 깨닫게 되는 데는 시간의 숙성이 필요했다.
내 안의 창을 찾기 위해서는 지름길이 무의미하다.
창으로 가는 길, 아득했지만 지척에 있었고 아름다우면서도 아름답지 않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레이스가 달린 어떤 창은 사람들을 유혹하고, 깨어진 어떤 창은 마음을 흩어지게 만들고, 하늘이 들어와 앉은 어떤 창은 방랑을 부추기고, 폐허가 되어버린 어떤 창은 가슴에 허무를 새겨버린다. 또 어떤 창은 눈물을, 한숨을, 희열을, 애증을, 결핍을....
창을 들여다보는 일, 창을 찾아 떠나는 일, 다시 창을 찾아 돌아오는 일, 생의 길에서 마주친 창의 숨결을 기록하는 일, 시간의 울림 속에 생의 울림을 알아차리는 일...
우리 곁에 ‘창’은 늘 존재한다.
저자 민병일의 창에 대한 작품 『창에는 황야의 이리가 산다』(2017년 전숙희 문학상 수상)는 자기 안의 낯선 ‘이리’를 찾아서 길 위를 걸으며 바이칼 호숫가 리스트뱐카, 중세 로텐부르크, 홋카이도 산골 외딴집, 몽골의 대초원, 와온바다, 옛 곡성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창들을 만난다. 창은 사라지는 것들과 사라지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기억을 소환하는 오브제다. 창의 아름다움은 때로 폐허 속에 존재한다는 확인 한다.
‘이리’를 찾아 나선 방랑의 길에서 저자는 도리어 자기 안에 갇힌 ‘이리’를 황야에 풀어준다. 봉인된 야성이 깨어난다. 민병일은 창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잊혀가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순례 길에서 마주한 창들의 모습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연결 지어 설명한다. 마음의 눈으로 창을 보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창을 통해 바라본 사물의 내면과 자신의 내면이 합일에 이르는 아름다운 경험을 하게 하는 책이다.
『창에는 황야의 이리가 산다』와 『창의 숨결 시간의 울림』은 모두 ‘창’을 모티브로 한 글이지만 다가오는 느낌은 다르다. 이번에 출간된 『창의 숨결, 시간의 흔적』은 이국의 창이 아닌 오롯이 이 땅의 창들을 찾아 헤맨 시간의 기록이다. 대지의 바람과 꽃 향기와 햇살과 나무의 기억들이 방랑자의 발걸음과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어우러져 있다. 창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단지 ‘창’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거룩한 번민의 창이면서 따뜻한 허무의 창, 창을 바라보는 일은 켜켜이 쌓인 추억의 퍼즐을 맞추는 작업이면서 자신의 영혼을 찌르는 비수가 되기도 한다. 어느 신석기인이 쓴 창 너머 글씨,‘연탄 41장’의 흔적, 빈집의 적멸에서 발견하는 겨울의 동화 한 편, 아우라지 마을 새하얀 고무신과 창에 비친 산 그림자, 한지 바른 창에서 마주하는 몬드리안의 꿈을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다. 제주 모슬포 앞바다 판짓집의 창 앞에선 스스로 섬이 되고 눈앞에 펼쳐진 화포 바다는 거대한 화포의 창이 되어 가슴에 들어온다.
이 책은 내면으로 가는 창을 찾아 오랫동안 헤맨 방랑자의 발과 방랑자의 눈과 방랑자의 손이 만들어낸 것이다. 내면의 ‘창’으로 가는 지름길을 안내하는 안내서가 아니라 먼 곳을 돌아가며 창에 대한 사유, 생의 흔적, 시간의 기억들을 품어보게 하는 책이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걸으며 우리는 자주 행간에서 멈추고, 밑줄을 긋고 도그 지어(dog's ear)를 하고, 영혼을 찌르는 사진 앞에 코를 킁킁 거리며 창의 숨결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에세이라는 장르가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고, 접근하기 쉬우며 먼 데서 소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생활에서 끌어내기 때문에 등단 작가들만의 영역이라기보다는 모두에게 열린 장르가 된 지 오래이기에 위로와 치유, 감성, 힐링을 준다는 에세이들은 넘친다,
서점에 있는 수많은 책들은 모두 누군가의 불면의 밤의 기록이지만 기대한 것만큼 만족스럽지 못한 책들도 많다. 책도 기호식품이다. 아무리 베스트셀러라 해도 입맛에 맞지 않으면 먹을 수 없다.(읽고 싶지 않다. 다시 정확히 표현하면 읽고 나서 후회가 밀려온다)
저자가 좋은 책을 쓰기도 어렵지만 독자가 좋은 책을 발견하기란 더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위로와 치유를 강요하는 책, 자기 계발을 하라고 재촉하는 책, 미라클 모닝을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거나 게으른 것도 권리라며 게으름을 정당화하는 책, 인생의 조언을 한다며 시시콜콜 신변잡기를 나열한 책.... 이런 책들을 읽고 나면 도리어 마음이 혼란스럽다.
민병일의 글은 섬세하고 아름답지만 인위적, 가공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다. 번지는 아름다움과 스며드는 아름다움, 창을 통해 만나는 사유, 비움, 다가감, 흔적, 기억, 멈춤, 추억, 회상, 허무, 나아감, 자각, 진보, 돌아봄, 따뜻함의 기록들이다.
『창의 숨결, 시간의 진동』서문에 등장하는 것처럼 저마다 창을 찾으러 간 오르페우스가 되어 저마다의 창에 비친 에우리디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곁을 잃어버린 시대... 곁을 회복하는 일은 내면의 창을 만나는 일임을 새감 확인하게 된다. ‘곁’의 회복과 ‘결’의 회복을 바라는 마음으로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창에 깃든 우연의 순간, 혹은 창의 미학
창을 바라보는 우연의 순간 우주 어딘가에는 불이 켜진다
창은 세상으로 가는 문이며 사람에게 가는 길이다. 창을 바라볼 때 좀 더 인간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창가에는 별이 뜨고 꽃이 피고 늘 무언가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색을 즐기는 몽상가들, 혁명을 꿈꾸는 구둣방 수선공, 미장원에서 파마를 하는 어머니, 건달, 봉우리를 오르는 사람, 커피를 마시는 이들, 숲길을 걷는 산책자,... 사람들은 저마다 작은 창을 통해 생의 풍경을 소환한다. 이토록 존재가 미적인 사물은 없다.
창을 바라보는 우연의 순간 여린 미소를 지을 때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 유리창 밖으로 보이던 운동장의 맨드라미와 눈송이, 아이들 떠드는 소리부터 창은 까맣게 잊고 살던 기억 이전까지 되살아오게 하는 마법을 지니고 있다. 창밖을 지나는 사람들이 동화 속 인형 같아 보일 때 동심과 형이상학 사이에서 현실을 낯설게 바라보게 하는 것도 창이다.
생은 창에 깃든 우연의 순간을 살아가고, 창은 생에 깃들어 우연의 순간을 보여준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창을 찾으러 간 오르페우스와 창에 비친 에우리디케..
오래전 나는 또 다른 오르페우스였습니다. 내 몸 안에서 미적인 창이 현상되는 것은 그 옛날 에우리디케의 마음에 남겨진 창을 예감할 수 있기 때문이며, 미적인 창을 찾아 방랑한 것은 내 유전자 어딘가에 박힌 오르페우스의 피가 에우리디케를 불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가 찾은 미적인 창은 모두 폐허였고 허무한 미로 속의 길 찾기 같은 것이었습니다. 보이는 창에서 보이지 않는 미를 찾는다는 건 명계의 끝자락, 빛 한줄기 앞에서 사라진 에우리디케의 손을 잡으려 어둠의 허공을 허우적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무엇인가 찾긴 찾았는데 돌아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창이란 존재와 무의 경계에 있거나 존재와 시간의 뫼비우스 띠 같은 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가 본 창들은 시간의 흔적을 품고 있었지만 시간을 초월했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아무도 쓰다듬지 않았지만 고귀한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창에서 보려고 했던 미는 무엇이며 창에서 찾고자 했던 삶의 미적 이상은 또 무엇일까? 텍스트 속의 미학은 관념적일 수밖에 없으므로 아름다움(Schönheit)을 창이란 사물에 매개시켜 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물에 상상력을 입힌다고 창의 아름다움이 나타나진 않았습니다. 시간과의 대화가 필요했고 행동이 굼뜬 나의 장기를 발휘하여 속수무책으로 창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 ) 죽은 것처럼 보이는 창이란 사물도 시-간의 탯줄에 싸여있는 영기(靈氣) 깃든 생명체이니까요. 침잠하는 시간 속에 가만히 무심한 듯 고요히 바라보면 사물도 말을 걸어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 ) 아름다움의 순간은 아주 짧고 빠르고 강렬하게 찾아왔다 사라집니다. ‘현전(現前)’이라고 할까요? 미의 현전! 이 경이로운 순간이 찾아오면 미적인 것들이 내면으로 길을 내는 게 보입니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지만 꿈이란 시간에 갇히지 않는 것이기에 ‘내면의 창’을 찾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내 안의 창을 만날지 알 순 없지만 끝없이 걷고 또 걸으며 내면으로 가다 보면 언젠가 에우리디케의 마음에 숨겨진 창을 만나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이 책은 온전히 우리 땅 흙냄새가 나는 창들로 채웠습니다. 장이 서는 곳이면 얼쩡거리는 장돌뱅이처럼 제주까지 창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지만 미적인 창은 잘 보이지 않았고, 창은 많았지만, 창에는 창이 없었습니다. 달빛 은연히 비치는 창과 별이 빛나는 창, 은하수가 흐르거나 안개에 싸여 묵상 중인 창도 보고 싶었지만 사라져 가는 풍경 속에 흩어지고 여의치 않은 시간 속에 잠겨버렸습니다. 하지만 제 몸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창이 생겨났고 제 영혼에는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이 반짝이고 있습니다. 창은 세상을 바라보는 통로이면서 불협화음의 세계를 내면화하여 정신을 반응하게 하는 미적인 명상 공간입니다. 당신은 어떤 창을 꿈꾸는지요?
『창의 숨결, 시간의 울림』 프롤로그 중에서
고드름 달린 창의 풍경
- 시간의 진동과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 -
이것은 배추 밭이 아니다.
어찌 된 일인지 밭에는 일렬종대로 선 배추들이 흰 눈을 흠뻑 맞은 채 얼어있었다. 밭 전체가 그랬다. 눈밭에 얼어붙은 배추들은 낯선 장엄함을 보여준다. 마치 진시황릉 병마용에 도열한 흙으로 빚은 병사들 같다. 금방이라도 흙먼지를 털고 깨어날 것 같은 무덤 속 용사들처럼 눈송이를 털고 싱싱한 얼굴로 환생할 것 같은 배추밭 풍경. 그러나 ‘이것은 배추밭이 아니다.’
우리에게 친숙하기 짝이 없는 배추밭이 낯설어 보였다.
낯섦은 일상적인 친숙함을 전복적인 관계로 발전시킨다. 우리에게 친숙한 일상적 사물이 유희적이고 전복적 사물로 바뀌는 데는 예술의 원리가 작동한다. 르네 마그리트 그림 「이미지의 배반」이 그렇다. 미셀 푸코의 말마따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 일뿐이다.
그림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쓰여 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문장이다. 배추밭에서 얼은 채로 눈을 뒤집어쓴 ‘배추’ 역시 그것은 ‘배추’가 아니라 그것은 ‘배추’라고 말하고 있는 문장이다. 배추밭 역시 그것은 배추밭이 아니다. 사진 속의 배추밭은 우리에게 박제되어버린 이미지, 혹은 이미지의 배반이 있을 뿐이다. / P22~24 발췌
아우라지 마을 집 고무신과 창
- 아포리적인 창의 추상 -
산을 품은 창에서 ‘아포리Aporie당혹’를 느꼈다.
아름다운 ‘당혹’이랄까! 그러나 수수께끼 같은 ‘아포리’는 지극히 철학적이고 미를 판단하는 형이상학이다. 기실 시골집 창의 이미지를 판단하는 미의 기준은 연민에서 나온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길가 하찮은 풍경에 눈길 줄 수 있는 연민.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과 풍경 속에서 정겨움과 쓸쓸함을 느낄 수 있는 연민. 따뜻한 허무가 무장무장 쌓이는 창의 연민……
거울에 비친 사물 같은 창 속의 산을 본다. 유리창을 보면 얼굴이 산에 겹쳐져 내 몸 안에 산이 들어있는 것 같다. P 103 발췌
-
어느 신석기인이 쓴 창 너머 ‘연탄 41장’
- 강진의 연탄 가게 아저씨의 벽과 핑크 플로이드의 < the wall>
깨진 창문 안의 글씨가 파편처럼 눈에 박혔다.
“연탄 41장”이라고 흰 벽에 삐뚤빼뚤하게 쓴 검은색 타이포그래피였다. 연탄 집 아저씨가 연탄배달을 위해 써놓은 것일까. 동네 어딘가에 있던 그 많던 연탄가게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어느 순간,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버린 연탄가게 흔적이 신기루 같았다. 주인 잃은 글씨에서 밥 냄새가 났다. 연탄 화덕 냄비에서 뜸 들이던 구수한 쌀밥 냄새였다. 구공탄 위에는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석쇠 위에서는 약간 탄 냄새를 풍기며 꽁치가 익고 있었다. 연탄가게에 저녁 밥상이 차려졌다. ‘연탄 41장’이란 글씨에서 밥상 앞에 둘러앉은 식구들을 보았다. 삶을 스캐닝 한 타이포그래피는 실제 풍경이 아니지만, 저녁 무렵 연탄 집 모습을 실제처럼 보여주었다. 감성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타이포그래피는 풍경과 대상을 이미지로 묘사한다. 연탄과 냄비 사이에서 발갛게 달구어진 별표 모양의 삼발이도, 연탄가게 아저씨가 목에 두른 쉰 내나 던 흰 수건도, 골목길을 누비던 연탄 지게와 지게 작대기도, 봉인된 저 활자 속에 갇혀있다. 연탄가게 아저씨 몸속에는 검은 탄가루가 쌓여갔다. 연탄장수 손톱 밑에 끼어있는 검은 때는 막 물들인 봉숭아 꽃물처럼 가실 줄 몰랐다. 눈 내리는 겨울밤, 새끼줄 끝에 매달린 까만 연탄 한 장과 봉지쌀을 가슴에 안고 걸어가는 날품팔이 가장도 보였다. / p 164~166
저것은 창이 아니라 영혼을 찌르는 아름다운 창이다.
- 그림 속의 눈, 지붕 위의 눈과 시슬레의 <루프시엥 가는 길>
저것은 창窓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찌르는 창槍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punctum’은 라틴어로 ‘점點’을 뜻하는데 이 단어는 뾰족한 도구에 의한 낙인을 가리킨다. 지붕에 난 구멍이 창문처럼 찍힌 사진의 인화지는 무수한 망점의 집결체이며, 미세한 망점들은 모자이크 조각처럼 하나의 형상을 꿈꾼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 「행복한 눈물」에 표현된 인쇄 망점dot처럼, 사진의 촘촘한 점은 선을 이루고 선은 다시 평면 위에 사물의 윤곽을 드러낸다. 사진 속의 밀도 깊은 망점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은 무엇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실체이고 감흥 덩어리이다. 사진 속 허물어져가는 집의 상처가, 지붕에 난 창문 같은 집의 상처가, 내 안에 숨겨둔 창문 같다. 세월과 사람들에게 상처 받으며 바깥을 동경하는 나의 작은 창! 사진 속 창窓의 푼크툼은 나를 찌르는 아름다운 창槍이다. / p 113
한지에 배인 생의 기하 추상
- 꽃잎 붙인 할머니의 창과 몬드리안의 꿈
자연은 순수한 빛의 회화를 만들어냈다. 자연은 눈앞에 존재하는데 하얀 어둠으로 하여 보이지 않는 대상. 대상의 윤곽은 마음속 심연에 깊게 숨어들어 무대상無對象의 세계만 남은 것일까. 할머니의 생이 은빛으로 남은 자리엔 환멸 같은 고독이 눈부셨다. 나는 저 창이 사라져 가는 여인의 생애가 남긴 예술이라고 생각했다. 삶의 내력 담긴 사물은 물자체를 표상하고, 오래된 이야기는 침묵한다. 예술 역시 세계의 꿈을 침묵으로 표상하지만 그 속은 무수히 발작적인 것들, 충동적인 것들, 상상적인 것들의 집합체이다. 삶과 예술 속에는 미적인 것뿐만 아니라 추한 것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오를 기세로 웅크려있다. 그러나 할머니의 창은 온화한 빛을 낼뿐 티끌만 한 무게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몬드리안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 역시 자연이나 사물을 단순하게 기하 추상화하여 그림이란 무대상의 심층에 대상을 켜켜이 쌓아두고자 했던 건 아닐까. 할머니 생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간직한 흰 창호지와 창살 문양의 공간이나, 몬드리안의 수직‧수평선이 꿈꾸는 기하추상의 형상 공간이나 같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농부의 아내로 일생을 흙만 일군 할머니의 생애는 어디에 숨어있고, 할머니는 속절없이 흘러 가버린 시간만 증언하는 것일까. 몬드리안 역시 어느 순간 증발해버리듯 사라지는 것이 삶이고 예술이라고 여겼는지 「노란 선들의 구성」(1933)을 만들었다. 서로 대칭되는 선들이 사라진 공간은 절제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마치 노년의 뜰에 자리한 텅 빈 공간처럼 욕망이 순수화된 해맑은 얼굴 같은 마음을 형상화시켰다. 마름모꼴 캔버스에 그려진 서로 다른 굵기의 노란 선들은 묘한 균형미를 보이지만, 마름모꼴의 불안정성은 원초적으로 불안정한 생의 단면을 노출하고, 노란 선 사이의 열린 공간은 밖으로 뻗어나가려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그린 것인지 모른다. 할머니의 삶이 그림 속의 빈 공간처럼 보인 건, 창으로 들이치는 눈부신
햇살 때문이었을까 / p 39_40
시뮬라크르의 꽃 혹은 <헤겔의 휴일>
- 부암동 부침바위 길 산동네 목수의 창과 르네 마그리트의 < 헤겔의 휴일>
축대로 세운 화강석 돌담 앞에 수령이 오래된 나무 한그루가 복사꽃을 피웠다. 나뭇가지마다 활짝 핀 복사꽃이 유리창에도 만개했다. 유리창에 핀 꽃은 나무의 혼이 빠져나와 착색된 분홍빛 혼 불같다. 유리창은 적당한 크기의 캔버스가 되어 꽃의 흔적을 담고 있다. 바람이 불면 캔버스 속의 꽃잎도 흔들렸고, 햇살이 내려쬐면 유리에 반사된
유리창에 핀 꽃
꽃들은 보석처럼 빛났다. 그리고 비가 오면 창에도 복제된 꽃비가 내렸다. 목수가 만든 벽 한가운데 유리창은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가상공간이다. 사계의 풍경을 색다르게 담아내는 유리창은 폐쇄 회로 속의 테크놀로지 아트처럼 유희적인 그림을 만든다. 유리창에 드리운 나뭇가지와 줄기마다 핀 꽃들은 카메라 렌즈의 초점이 인식하지 못해 흔들려 보였다. 의도하지 않은 작란作亂 같은 이 의도는 사물의 아우라가 사라진 허상, 즉 시뮬라크르simulacre의 꽃이다. 거울의 표면에 비친 얼굴처럼, 심층일랑 헤아리기 어려운 거울 속에 잠재한 무의식처럼, 꽃을 비치는 창. 창은 꽃의 메타포이고, 꽃은 창의 이데아이다. 창과 꽃, 꽃과 창은 현실에 존재하지만 현실을 초월하고, 현실 너머 이데아에 머물면서 현실에 존재한다. 창에 비친 풍경은 예술을 데자뷰deja vu 하는지, 르네 마그리트René François Ghislain Magritte의 그림 「헤겔의 휴일Hegel's Holiday」이 겹쳐졌다. 마그리트는 세계에 존재하는 현상을 낯설게 인식하여 자신이 훔쳐본 영원 속의 이데아를 그리거나, 예술의 메타포를 우리들 삶에 툭 던지곤 사라진다. 그림 속에 활짝 펴진 검은 우산 위에 올려놓은 물 컵이 그랬다. 서로 상관없는 두 개의 오브제를 한 공간에 두어, 낯선 상황을 연출하는 르네 마그리트의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은, 생을 긴장시키며 신비로운 세계로 이끈다. 수수께끼 같은 그의 그림은 생의 이면에 숨은 모순되고 이질적이고 비논리적인 상황, 이성 밖에서 배회하는 무의식, 꿈 등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이며, 제도에 얌전하게 길들여진 상상력을 전복시킨다. 일상에 길들여진 생을 낯설게 보여주는 전복이란 얼마나 멋진가. 마그리트 말대로 그가 물 컵을 천재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물 컵에 줄을 그어 드로잉 하다 보니 우산이 되었는지, 헤겔 변증법을 좋아했는지, 헤겔을 흠모해서 ‘헤겔의 휴일’이라 했는지 모르지만, 자명한 것은 그가 작품을 만들게 된 모티프가 아니라, 작품이 우리에게 어떻게 보여 지는가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우리 생의 문을 우연히 열고 들어선다. 그리곤 각자가 짊어진 시간의 무게 앞에, 무관심한 사물들 앞에, 각박한 삶에 길들여진 이들 앞에, 자기 생을 전복시키고 공기처럼 가벼워지라고 그림 한 장을 내민다.
유리창에 핀 꽃을 찾아 창 속으로 들어가면 어디쯤에선가, 우리가 잃어버린 낯선 시간들과 황야를 방황하는 하얀 이리 한 마리, 몽당연필, 파란 바람 한줄기, 그리고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만날 것만 같다. 현실과 이데아 사이의 경계에서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신비한 분위기를 비친 「헤겔의 휴일」이나,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준 빈집 유리창의 꽃, 어쩌면 그것들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영원불변한 실재의 메타포라는 생각이 든다.
자연의 시간에 순응하는 생명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약동하는 소리를 전해오고 있다. 침묵의 그 소리는 그리움의 사신이다. 긴 겨울의 끝과 이른 봄 사이에 숨은 낯선 그리움은, 시간의 진화에 맞춰 빈집에 아주 여린 진동을 전한다. 바람의 숨결 같기도 하고 그리움의 얼굴 같기도 한 미세한 떨림. 꽃이나 나무는 별빛 싣고 온 공기의 파동에도 반응하고 달빛에도 몸을 연다. 빈집은 시간을 횡단해가는 그리움을 싣고 점멸해 갔다. 눈부시게 빛나는 황금빛 나무를 바라봄이 생의 경이로움이라면, 빈집처럼 사라져 가는 풍경 또한 낯선 경이로움이다./p 119-122
따뜻한 허무의 창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유인력과 파울 클레의 <오래된 소리 >
나주 석현마을 빈집 창이 그랬다. 창 앞에 요요히 흔들리는 억새풀들, 헝클어진 머리처럼 지붕에 웃자란 잡초들, 주인 잃은 항아리들, 저 홀로 꽃을 피운 동백과 연보라 무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대문은 사라지고 앞마당 가득 봄바람에 낭창낭창 흔들리는 억새 사이 창문 유리가 반짝였다. 유리창은 인적이 사멸된 공간에서 저 홀로 빛나고 있었다. 창을 방랑하며 풀리지 않던 그리움을 슬라이드 필름에 새기기로 한 것도 빈집 창이 실낙원 같았기 때문이다. 빈 집은 정지된 시간 속에 침식당하며 주저앉아갔다. 두텁게 내려앉은 먼지는 빈집의 기억을 희뿌옇게 지워갔다. 그러나 빈집 창에서 만큼은 ‘따뜻한 허무’가 느껴졌다. 창의 소리는 침묵하고 있지만 오래된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따뜻한 허무의 창. 억새 흔들리는 빈집 창에 빛이 닿고 낮달이 뜨고 몽상적인 바람이 분다. 창가에 흔들리는 억새 소리가 파울 클레Paul Klee의 그림 「오래된 소리Alter Klang」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햇빛과 바람 사이에서 반짝이며 소리를 내는 억새가 창을 스칠 때마다, 조각보 무늬처럼 다채로운 추억 간직한 유리창은 오래된 소리를 낸다. 사람과 사물의 마음에는 색색의 소리상자가 들어있다. 클레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색색의 소리, 들릴 듯 들리지 않는 소리의 색색을「오래된 소리」란 그림에 새겨놓았다.
빈집의 쇠락한 창은 허무한 모습이지만 무언가를 갈망하고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피폐한 창이라고 해서 무의미하고 깜깜한 허무가 깔려있는 건 아니다. 인생도 그렇고, 예술도 그렇고, 사물도 마찬가지로, 허무를 바탕으로 타오를 때 가장 절실한 빛을 발한다.
소박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인간의 가슴은 듣고 있지
허무에 대해-
세계를 새롭게 하는
힘인 ‘허무’-
-에밀리 디킨슨의 시 「소박하게 더듬거리는 말로」 전문
빈집에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공을 떨어뜨리면 바닥에 부딪혀 튀어 오르려는 탄력대신, 공간을 떠도는 기억의 환각만이 존재한다. 빈집은 사물의 무중력 지대이다. 사람이나 사물의 그 무엇이, 탄력 있게 튀어 오르는 공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사람의 호흡이 튀어 오르고, 나의 웃음이 너에게 튀어 오르고, 왕겨 때느라 풍구질 하는 어머니 눈가에 메케한 연기 튀어 오르고, 아버지가 장작 패는 소리 튀어 오르고, 식구들 온기에 아카시아 향 튀어 오르고, 양은냄비 속 비빔밥 먹느라 바닥 긁는 소리 튀어 오르고, 김치찌개 뜨는 식구들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튀어 오르던 소리의 화음, 창의 기억! 사람 사는 집에는 식구들 간의, 식구와 사물 간의 만유인력이 존재한다./ P 217-225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