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그러한 것들을 기억하는 일
폐허가 되어가는 곳...
재개발되지 않는 몇몇 기관을 제하고 모든 곳은 폐허로 변해갔다.
오랜만에 책을 빌리러 간 도서관 근처..
8월의 은행나무는 진초록 빛이 무성하다.
X자 테이프가 붙어있던 집들도 대부분 철거되고 이젠 몇 집 남지 않았다.
그 소란스러운 소음 속에서도 나무는 아랑곳없이 자라고 있다.
뿌리내리고.. 더 깊이 뿌리박고... 나무들은 내일을 알지 못한다. 나무들은 오늘 해야 할 일에 충실하다.
매미들은 그 나무에 매달려 바락바락 소리를 지른다.
땅을 후벼 파는 중장비의 굉음과 먼지 날리며 달리는 폐기물 트럭들의 분주함...
나무들은 그런 것들에는 무관심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의연해 보이는, 오히려 담담해 보이는 나무. 받아들임의 성자처럼 보인다.
나무들의 끝을 바라본다. 중첩된 잎 사이로 가리어진 하늘이 보인다.
세워지는 것들은 사라질 것들의 위에 들어설 것이다. 무너뜨리고 다지고 깊이 파고... 세우고... 수많은 콘크리트들이 들어선 곳... 질서 정연하게 자리 잡을 것이다. 인위적인 질서. 계획도시.
수령 깊은 이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고.. 조경을 위해 또 어떤 어린 나무들을 가져와 심을 것이다.
모처럼 다시 만난 거대한 은행나무 군락... 만일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아무도 개발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곳은 거대한 은행나무 군락지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가끔 나무와 나무들이 손과 손을 마주 잡고 회색의 냉소적인 건물들을 와해시켜버리는 상상을 해본다.
일체의 인위적인 것들을 거부하고 오직 자연의 힘으로만 다시 새로운 것들을 재건시킬 수는 없을까...
도시 한가운데 아무도 들어가지 않은 원시림이 들어설 수는 없을까..
폐허가 된 흔적. 온통 폐기물뿐이다. 그 위에 인간들이 자신의 공간을 점유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는 적막하다.
인간적인 온기가 사라진 곳...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폐허가 되어있다.
기억하는 일. 사라지는 무언가를 기억하는 일...
그 도시의 얼굴을 기억하는 일. 그곳에 있었던 나무의 의연함을 기억하는 일
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억하는 일,
노란 버스를 타고 등원하는 아이들에게 손 흔드는 젊은 다문화 엄마들의 미소를 기억하는 일.
은행나무 아래 서서 하늘을 바라보던.... 그 은행나무 아래를 걷던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을 기억하는 일...
폐허 이전의 온기를 기억하는 일...
세련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더라도 본래 그 자리에 존재하였던 것들을 기억하는 일.... 본디 그러한 것들을 기억하는 일. 그 모든 시간들을 더듬어 생각하는 일....... 소리 없이 꽃이 피고 지던 그 봄날의 춤과.. 여름날의 햇살을. 가을바람에 흩날리던 은행잎의 군무를... 그 가파른 비탈을 올라 채지 못해 몇 번이고 미끄러지던 한겨울의 빙판길을 기억하는 일..... 나목이 된 나무의 모습을 기억하는 일..
x 자로 차단된 그곳에.... 차단되지 않았어야 했던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일...../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