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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시메르를 지고 간다

저마다 자신의 시메르를 지고 간다

보들레르의 산문시


막막한 잿빛 하늘 아래, 길도, 잔디도, 엉겅퀴 한 포기도, 쐐기 풀 한 포기도 없이, 먼지로 뒤덮인 막막한 벌판에서, 나는 몸을 구부리고 걸어가는 사람들을 숱하게 만났다. 그들은 저마다 커다란 시메르를 한 마리씩 등에 짊어지고 있었으니, 무겁기가 밀가루나 석탄 부대, 또는 로마제국 보병의 군장 못지않았다.

그런데 이 괴물 짐승은 생명 없는 하중이 아니라, 오히려 그 탄탄하고 억센 근육으로 사람을 덮어 누르고 있었다. 괴수는 그 거창한 갈퀴 발톱 두 개로 저를 태우고 가는 생명의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었으며, 그 전설적인 머리는 사람의 이마 위로 솟아올라, 그 모양새가 마치 고대의 전사들이 적군의 공포감을 더욱 부추겨주길 바라면서 썼던 그 무시무시한 투구 가운데 하나처럼 보였다. 나는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질문을 하였던바, 어디를 이렇게 가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전혀 알지 못한다고, 자기도 다른 사람들도 그에 관해 아는 것이 없다고, 그러나 걸어가려는 거역할 수 없는 욕구에 쫓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히 어디론가 가고 있다고 대답했다. 이 나그네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제 목에 매달리고 제 등에 엉겨 붙어있는 이 흉포한 짐승에 대해 분노하는 모습이 아니었으니 , 이 짐승이 자기 자신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 피곤하고 진지한 얼굴 하나하나에는 아무런 절망의 낌새도 비치지 않았거니와....

- 샤를 보들레르 < 파리의 우울 > 문학동네 저마다 시메르를.


시메르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로서 '공상'이나 '망상'의 뜻을 지녔다고 한다.

(로스 카프리초스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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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괴물로 티폰과 에키드나의 딸이다. 머리와 발 다리는 사자, 몸통과 사자의 목 근처에 있는 머리는 염소(또는 양), 꼬리는 머리가 달린 뱀(이무기, 용)으로 되어 있다. 발음에 따라 키마에라, 키메이라 또는 카이메라 (Chimera)라고 불리는데 프랑스에서는 시메르[흐] (Chimère)라고 부른다.

케메라.jpg

히타이트의 전설 신화에서는 계절을 상징하는 신성한 성수로 나오며 사자가 봄, 염소나 산양이 여름, 뱀이 가을과 겨울을 상징한다. 키메라의 세 머리는 각각 독자적인 학습, 자아, 의지, 기억, 습성, 성격, 생각, 마음, 감정, 가치관 등을 갖고 있어 머리 간의 의견 충돌 싸움이 번번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저마다 자신의 시메르를 지고 있다. 사자와 염소(양), 뱀(이무기)이 한 몸에 공존하는 시메르를 등에 지고 이 무거운 짐승을 지고 어디로 가느냐는 물음에 전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다.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욕구에 쫓기는 사람들. 의무인지 당위인지 모를 거역할 수 없는 욕구 아래 걷고 있다. 어느 누구도 제 등에 엉겨 붙은 짐승에 대해 분노조차 하지 않는다니 자신의 시메르에 길들여진 셈이다. 아주 오래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 자신의 등에 엉겨 붙은 시메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린. 적의 조차 품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다.

사자 머리의 시메르는 강해질 것을 요구하고 양이나 염소 머리의 시메르는 받아들임을, 뱀의 시메르는 능수능란한 처세를 요구한다. 힘이 강하면서도 수용하는 능력, 능수능란한 처세까지 갖춘다면 시메르를 진 사람들은 천하무적이 될 것 같지만 실은 그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는 일은 어렵기만 하다.

시메르를 지고 저항 없이 걷고 있다. 오늘이라는 주어진 생을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포효하는 저마다의 시메르를 본다. 때론 사자가, 때론 염소나 양이, 때로는 뱀의 얼굴이 나타난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 만난 이름 모를 풀도 자신만의 시메르를 지고 있었다.


어린 풀의 그림자가 내 눈에는 풀의 시메르처럼 보였다. 사자와 염소, 뱀의 형상이 풀 그림자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시메르를 지고 있는 풀은 강해 보였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들은 반드시 크고 강력한 것이 아니다. 부서질 듯 연약한 그러나 고독한 종교와도 같은 풀의 직립이다. 풀은 보도블록 틈과 틈 사이, 뿌리를 뻗어가며 존재 증명 투쟁 중이다.

한 여름의 햇살 아래 얼굴을 내미는 연초록의 당당함. 아무도 자세히 보는 이 없어도. 그 작은 틈에서 자신만의 하늘을 이고 자신만의 우주를 세우는 거룩한 담대함이 그곳에 있었다.

다시 풀 그림자를 바라본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풀의 시메르. 아침 햇살이 만들어낸 그림자. 회색 틈을 뚫고 직립한 작은 풀이 자기 몸집보다 훨씬 큰 그림자를 끌고 간다. 긴 그림자를 끌고 생의 어딘가를 향한 무한 전진은 거룩하다. 산책 길에 만난 작은 풀 조차도 자신의 전 생을 지고 가고 있었다. 자신만의 시메르를 태연스럽게 지고 걷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지도 모를 가장 연약한 풀 앞에서 김수영의 시 <풀>을 생각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고 더 빨리 일어나는 풀.

날이 흐리고 발목까지 발밑까지 누워도...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먼저 일어나고 ‘

늦게 울어도 먼저 웃는 풀..... 김수영의 시에 등장하는 바람과 풀의 이미지는 아닐지라도 세상 어디든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 풀’들에게 눕고 울고 웃는 일은 중요하다.


회색 동그라미 안의 풀은 정지되어 있고 인간의 눈으로는 안정되어 보이지만 가두어진 경계 내에서 생존 투쟁 중이다. 풀은 결코 연약하지 않다. 발밑까지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날 테니까.

연약하고 작은 풀, 그 작은 틈에서 자신만의 하늘을 이고 자신만의 우주를 세우는 거룩한 담대함과 숭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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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의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풀은 회색 틈을 뚫고 자신만의 시메르를 지고 자기 생의 어딘가를 향해 전진중이다. 그곳이 어디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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