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아름답다
당신의 연극은 현재 진행 중이다
"내 안에 여러 인물들을 만들었다. 나는 끊임없이 인물들을 만들어 낸다. 꿈 하나가 시작되면 바로 한 인물이 나타나고 그 꿈은 내가 아니라 그 인물이 꾸는 꿈이 된다. 창조하기 위해 나는 나 자신을 파괴했다. 내 안의 나 자신을 너머 많이 밖으로 드러낸 나머지 이제 내 안에서 나는 껍데기로만 존재한다. 나는 다양한 배우들이 다양한 작품을 공연하는 텅 빈 무대다. 상상 속 인물들은 현실 속의 인물보다 더 선명하고 진실하다
. - 불안의 책
당신의 연극은 현재 진행 중이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실습 없이 죽는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말처럼 우리 삶에서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하루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늦은 밤이 되면 스쳐버린 것들에 대한 아련함 같은 것들이 밀려온다. 삶에는 리허설이 없고 날마다 실전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언가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다시 밤을 맞는다.
너는 존재한다 -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너는 사라진다 - 그러므로 아름답다.
존재하기에 사라지고 사라지기에 아름답다는 시인의 역설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춘다.
우리는 존재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사라질 것이며, 사라질 것이기에 아름다운데 대체 무엇 때문에 쓸데없는 불안으로 하루를 가득 채우는 것이냐고 묻는다. 존재‘라는 것은 ’ 지금 여기‘에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다.
'존재자'로 살아야 하는 현실이 버거워질 때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투스의 글을 다시 찾아 읽곤 한다.
"우리 모두는 연극 무대에 선 배우들과 같다. 신의 의지는 우리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우리들 각자에게 인생 속의 배역을 맡겼다. 우리들 중 누구는 단역에 출연할 것이고 또 누구는 장막극에, 가난한 이, 장애를 지닌 이, 유명인, 정치지도자의 배역을 맡을 수도 있고 아주 평범한 시민의 배역을 맡을 수도 있다.
어떤 배역이 우리에게 정해질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그 배역을 그대로 받아 들 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주어진 배역을 최선을 다해 충실히 연기해야만 한다. 배역에 불평해서는 안 된다. 어떤 배역이 맡겨지든, 어떤 상황 속에서 그 배역을 해내야만 한다면 나무랄 데 없는 최상의 연기를 펼쳐라. 그대에게 작가의 배역이 맡겨졌는가?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쓰라. 그대에게 독자의 배역이 맡겨졌는가?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읽으라. "
앵케이리디온(삶의 기술)
당신은 인생이라는 연극 무대에 선 배우,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맡은 배역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는 정언명령과도 같은 그의 말을 밑줄 치며 다시 읽는다.
연극을 구상한 신은 우리 의견을 구하지 않고 각자 인생 속 배역을 맡겼다. 배역은 선택의 여지없이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에픽테투스는 배역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배역에 최선을 다하라 한다. 게다가 나무랄 데 없는 최상의 연기를 펼치라고 주문한다.
주어진 역할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이에게 나무랄 데 없는 연기를 주문하는 신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밤. 어디로 가야 할지 마음은 정처 없는데 어디선가 보이는 한 줄기 빛을 찾아 움직이는 나방. 그 불빛이 구원의 불빛 일지 죽음의 불빛 인지도 모르면서 어쨌든 그곳을 향해 돌진하는 나방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누구에게나 삶의 허기란 존재하는 것이니, 삶의 허무가 밀려오는 길목은 있게 마련이니.
인생 연극 제1막 아버지를 잃고 우는 젊은 딸의 역할을 맡았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찬연하고 아름다웠던 20대. 풋풋하던 젊음의 시절, 회색 병실에서 목이 꺾여가는 샛노란 프리지어를 보고 있었다. 똑똑 떨어지는 링거 방울을 바라보면 천청의 도트무늬를 세고 아버지의 불규칙한 숨소리를 들었다. 완치되어 나가리라는 희망은 접은 지 오래였다. 병원은 그저 다음 생을 향해 가는 길에 잠시 거쳐 가는 곳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다가갈 수 없는 존재였다. 어렵고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 늘 철두철미하던 그런 아버지가 바싹 마른 몸에 누렇게 뜬 얼굴로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 덩달아 나의 젊음도 고갈되고 있었다. 아버지의 역할은 환자로서 다시 일어나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는 역할이 아니었다. 향기가 소멸해버린 프리지어도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말라가는 것들은 아름답지 않았다. 아버지가 꼬챙이처럼 말라가는 것도, 나의 젊음이 말라 가는 것도, 프리지어가 말라 가는 것도...
아직 젊은 아버지를 잃고 오열하는 딸의 역할을 해야 했다. 울음조차 말라서 잘 터지지 않았다. 도리어 담담했다. 투병 기간이 길어서였을까 아버지를 잃고 오열하는 역할을 무대 위에서 실감 나게 하지 못하였다. 겉으로 울고 싶지 않았고 다만 숨죽여 울고 싶었다. 과도한 마음의 준비가 불러온 부작용이었다. 뒤늦은 슬픔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가슴을 후벼 판다. 아무리 다른 배역을 맡았다 해도. 아버지의 연극이 막을 내렸다고 해도 오열하는 역할은 여전히 진행 중인 것이다. 힘들 때면 오래전 20대의 그날로 돌아간다. 다시는 불러볼 수 없는 이들을 기억하며 비로소 제대로 오열하고 있다.
내가 되고픈 역할, 바라는 역할, 좀 더 좋아 보이는 역할을 신은 나를 위해 준비해 두셨을까? 그러나 원하는 역할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어떤 배역에 대한 기대치를 접으니 나는 점점 무대 위에서 담담해져가고 있다. 젊은 날. 무대 위에서 겪었던 아픔이나 설움이 가져다준 오랜 학습의 결과일 것이다. 세상에 던져진 우리들은 저마다 자기 삶의 연극배우다. 몇 막 몇 장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언제 무대의 불이 꺼지고 폐막을 알리는 커튼이 내려올지 모른다.
신이 어떤 배역을 맡길지라도 나무랄 데 없는 최상의 연기를 해야 하기에 그에 합당한 페르소나를 고른다. 원하는 것이든, 원하지 않는 것이든 두 번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펼쳐야 한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실습 없이 죽는다.” 는 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말을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