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다 써버리고 싶다 내 안의 모나리자를 찾아서...
날마다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축제 나는 나를 다 써버리고 싶다.
“내가 존재하는 것은 삶이 나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은 세상을 향해 던져진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그 물음에 나의 해답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세상이 주는 답에 따라 살뿐이다.”/ 칼 융
날마다 자화상을 그리고 있다. 화폭에 담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그린다. 얼굴에 그린 자화상은 칼 융의 말처럼 세상을 향해 던진 질문들에 대한 답이 아닐까. 세상을 향한 질문들의 답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답이 새겨진 얼굴이라 생각하면 서글프다. 어느 경우든 얼굴은 수많은 질문들의 답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얼굴에 퇴적된 시간은 날마다 삶의 주름을 새기고 있다.
자화상들은 한결같이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현시된 자신의 생을 진지하게 응시하는 것, 주어진, 지나온, 가야 할 생을 어떤 형태로든 응시하다 보면 끝없는 자기 연민에 빠져들고 만다. 자화상은 가장 자기 다운 순간을 포착하여 그려내는 개성적인 작업이기에 시간들을 어떻게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자화상도 달라진다. 어떤 표정이 자신을 대표할 수 있을까? 자화상을 그리는 작업은 생에 대한 응시의 기록이자 답을 찾는 과정이며 자기 안의 타인을 끄집어내는 작업이다.
고통스러운 표정과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긴 화가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능하면 고통을 배제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이라면 고통에 일그러진 모습, 슬픔에 젖은 얼굴, 궁핍과 가난, 절망에 찌든 모습을 굳이 자화상으로 남겨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일부러 고통의 순간을 그림으로써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맛보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장 처절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의 자화상은 그만큼 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욕망의 표현일 것이다. 자화상을 그리는 행위는 '참회록' 혹은 '고백록'을 쓰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세련되고 아름다운 화가의 자화상보다 한쪽 귀를 도려낸 고흐의 자화상이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은 바로 화가의 고통과 슬픔이 관객인 우리에게 그대로 전이되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의 처절한 고통이 느껴지는 자화상 앞에서 관객들은 "나는 누구인가?'를 묻게 된다.
몸체는 보이지 않고 얼굴만 부각되어 보이는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은 수염 한 올, 한 올이 세밀하게 표현된 작품이다. 정면을 응시하는 부릅뜬 두 눈, 매섭게 올라간 눈꼬리, 오뚝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몸통은 없고 얼굴만 남아있어서 호기심을 자아냈던 그의 자화상은 정밀 분석 결과 가슴까지 그려진 작품인데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지워지고 얼굴만 남은 것이라 한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편안하고 인자한 모습이 아닌 가장 ‘윤두서 다운’ 표정을 포착하여 그려낸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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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 묘사된 윤두서의 초상화와는 정반대로 김수환 추기경의 자화상은 단순하다. 게다가 자화상 아래에 '바보야'라고 적어 놓았다. '삶을 돌아볼 때마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더 가난하게 살지 못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지 못한 부분이다'라고 말했던 추기경은 바로 그런 이유로 자화상에 '바보야'라고 적어놓았던 것일까?.
'바보야'는 사제로서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하며 살아오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과 자책의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의 자화상을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당신은 바보야'라는 말처럼도 보인다.
'자화상'아래 적힌 '바보야'를 오래도록 바라본다. 되지도 않을 것들, 허황된 것들을 탐하는 것도 바보짓이고, 바보짓인 줄 알면서도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도 바보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그토록 바보 같은 짓을 되풀이하다 생을 마감하는지 모른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바보인 것이다. 최대한 절제된 선으로만 표현된, 눈, 코, 입, 귀. 추기경의 자화상은 우리에게 "바보야, 이것이면 충분하다. 더 무엇을 바라는가?"라고 묻고 있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나’는 가장 익숙한 주제지만 너무나 자주 변덕스러운 존재이기에 너무나 자주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램브란트에 필적할 정도로 자화상을 많이 그린 프리다 칼로. 그녀의 자화상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온몸에 화살이 꽂힌 한 마리 사슴은 프리다 칼로 바로 자신이다. 그녀 몸에 꽂힌 화살은 누가 쏜 것일까? 행복하지는 않았던 결혼 생활의 상징으로 그려진 화살 맞은 사슴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런 모습의 자신을 그려내게 한 것일까?
프리다 칼로는 일기장에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적어 놓았다. 지상에서 그녀의 마지막 외출은 행복하였을까? 그녀의 자화상은 생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한다. 그녀의 말처럼 가장 익숙한 존재이면서 가장 낯선 존재이기도 한 자신. ‘나’를 찾는 일은 늘 어렵다.
*천경자의 자화상 :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뱀을 머리에 화환처럼 두르고 가슴엔 장미꽃을 꽂은 긴 머리 여인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22살 때의 결혼과 첫딸을 낳았던 경험, 슬프고 우울한 기억을 자신의 자화상에 형상화한 작품이라 한다. 자화상 속의 형형한 눈빛은 세상을 달관한 자의 눈빛이다. 그녀 자신을 그리면서 수없이 응시했을 그녀의 '눈'. 눈동자 속에는 지상에서 '천경자'라 불리는 여인이 앉아 있다.
사람은 저마다 슬픈 전설의 몇몇 페이지들을 간직하고 있다. 내 슬픈 전설의 24페이지 첫머리는 아버지의 부재로 시작된다. 부스스한 머리에 아무거나 대충 입고 병색 가득한 아버지와 화단의 동백나무 아래 나란히 서서 찍은 사진이 있다. 어딘지 모르게 세상을 달관한 자처럼 보이는 아버지 곁에 어떤 불안감을 애써 감추고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서있는 나는 24살이라는 찬란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끝내 다시 펼쳐볼 수 없는 내 삶의 24페이지가 천경자의 슬픈 눈빛과 겹쳐진다.
*파울라 모더존-베커의 자화상 <동백나무 가지를 든 자화상>은 흙빛에 가까운 색으로 여인의 몸과 얼굴을 표현한 단순화된 누드 자화상이다. 고대 이집트 미술작품에 영감을 받아 완성한 작품이라 한다.
유난히 크고 선명한 두 눈은 어디를 응시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는 잎이 6개 달린 동백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꽃이 아닌 잎을 든 여자의 누드 자화상. 관능적이지 않고 도리어 슬프다. 흙빛으로 표현된 누드는 가장 원초적인 자기다움을 드러낸다. 꽃은 하나 없고 잎사귀만 달린 마른 가지를 든 여인. 그녀 자신이 꽃이다. 만일 이 자화상의 제목이 '동백나무 꽃을 든 여인'이었다면 우리의 시선을 이토록 강렬하게 붙잡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내가 아는데 나는 아주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픈가? 축제가 길다고 더 아름다운가? 내 삶은 하나의 축제, 짧지만 강렬한 축제이다. 마치 내가 나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에 모든 것, 전부를 자각이라도 해야 하듯이, 나의 감각은 점점 더 예리해진다. (중략) 그러니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이 한번 피어나고 좋은 그림 세 점을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손에 꽃을 들고 머리에 꽃을 꽂고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나겠다."
(파울라의 일기 중)
“당신은 당신을 다 써버렸다”는 릴케의 말은 파울라의 이른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자화상은 가장 명징한 삶의 흔적이며 자기 증명의 수단이다. 누군가가 남긴 자화상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자서전을 읽고 있다. 얼굴은 고정돼있지 않은 변화무쌍한 화폭이다. 사람은 얼굴에 저마다의 자화상을 그리지만 시시각각 변하는 얼굴을 모두 대표하는 완벽한 자화상이란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의 얼굴에 그리는 자화상은 끝내 미완성일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의 나를 그리고 있을까? 또 어떤 모습의 자화상으로 남겨질까? 내 슬픈 전설의 몇 페이지를 쓰는 중일까? 프리다 칼로처럼 화살을 맞고 피 흘리는 한 마리 사슴일까? 먼 곳을 응시하며 모든 것을 달관한 흙빛 누드의 파울러 모던 존 베커의 모습인가?
프랑스의 예술가 표트르 바르소니는 <피카소가 모나리자를 그린다면> 이란 책에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전적 의미의 모나리자를 책에 소개된 31명의 화가들이 ‘모나리자를 그린다면 어떻게 그렸을까?’라는 전제하에 각자의 독특한 화풍을 빌어 개성적인 방식으로 모나리자를 표현하였다. 점, 선, 면, 그리고 입체, 색조, 느낌과 감정에 따라 수없이 분해되고 재조합되어 탄생한 모나리자는 예술은 더 이상 망막적이지 않음을 보여 준다. 유독 나의 관심을 붙들어 맨 작품은 앙리 마티스 스타일로 재해석된 모나리자였다.
활처럼 유연한 눈썹, 길고 큰 눈. 유혹적인 입술과 계란형 얼굴, 창백한 얼굴에 화사한 핑크빛 볼터치, 연둣빛 노랑의 긴 머리카락. 풍만한 가슴이 드러나 보이는 보라색 원피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도발적이고 쏘아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이었다.
나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의 모나리자에 시선이 꽂힌 것은 릴케가 파울라 모던 존 배커에게 했던 말 "당신은 당신을 다 써버렸다."가 그림 속 모나리자에게 꼭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나를 다 써버리지 못하고 있다.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틀에 박힌 사고, 변화를 두려워하고 익숙함의 관성을 되풀이하는 나는... 여전히 나를 제대로 꺼내 써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내 안의 나는 늘 억눌린채 몸부림치고 있는지 모른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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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무엇이 아닌 오직 '나'로 살고 싶은 열망을 담은 모나리자.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가장 본연에 가까운 모습의 나를 생각했다. 왜 그것에 이르는 일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속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나'를 다 써버린 그 어느 순간이 찾아오기를 간절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