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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여의 인간과 티끌의 인간

서로를 그리워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 우리 인생에서 삶과 예술에 의미를 주는 단 하나의 색은 바로 사랑의 색깔이다."

마르크 샤갈


서로를 그리워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주사위 등의 물건을 반으로 잘라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두 사람이 각각 나누어 갖고 있다가 어떤 목적에 필요할 때 서로 아귀가 맞는지 맞추어봄으로써 자기 신분을 입증하였는데 바로 그렇게 신분 확인을 위해 둘로 나눈 것 각각을 “Symbolon” 이라 한다. 부절은 돌이나 대나무 쪽 청동 등으로 만들어 주로 사신의 실물로 이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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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과거 인간은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남성과 여성의 세 개의 성으로 구분되어있었다고 말한다. 몸 전체는 구형이며 4개의 팔과 4개의 다리, 원통형의 목 위에 비슷한 두 개의 얼굴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지금처럼 곧추서서 두 방향 중 어느 쪽으로든 원하는 대로 걸어 다녔고 꽤 빨리 달리기도 했다. 공중제비하는 사람들처럼 다리를 곧게 뻗은 채 빙글빙글 8개의 팔다리로 돌아다녔다. 힘과 활력이 넘쳐 오만하고 급기야 신을 공격하자 신은 인간을 반으로 나누면 힘은 약해지면서 수가 늘어나니 더 쓸모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인간을 반으로 나누어버렸다. 남성과 남성, 여성과 여성, 남성과 여성 조합은 각각 따로 분리되어 버렸다. 절반이 잘린 인간들은 아폴론에게 반으로 잘린 곳을 치료해 달라고 해서 오늘날과 같은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본성이 둘로 잘리다 보니 서로의 반쪽을 그리워하다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다. 제우스가 이를 가엽게 여겨 그들이 상대방을 통해 생식하여 종을 늘리게 했다. 그리하여 인간들은 오래전 서로에 대한 온전함을 추구하고 싶어 했고 이를 '에로스'라 칭한다.


오래전 누군가와 한 몸이었을 우리는 끝없이 징표를 찾아 헤맨다. 우리는 누구나 타인의 부족한 한 조각, 누군가가 놓쳐버린 퍼즐 한 조각을 품고 있어 누군가에게 퍼즐을 건네주면 비로소 완성되는 퍼즐판 같은 것일까. 누구든 결여를 품고 산다. 그 결여를 채우기 위해 수많은 것들에 다가간다. 다가서서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닫고 결여를 메울만한 것들을 다른 누군가에게서 찾아내면 놀랍다. 나와 비슷한 퍼즐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우연히 마주치면 신기하기까지 하다.

부절이든 부신이든 반편이든 인간 본성은 ‘그리움’에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 그리움은 반으로 잘림 때문에 생겨난 정서 인지도 모르겠다. 결여와 틈을 지니고 사는 미약한 인간들 꼭 맞는 퍼즐판을 발견하지 못하면 못한 대로 살아간다. 꼭 맞는 퍼즐판을 평생 만나지 못하면 말이다. 때로는 자신에게 있는 퍼즐판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열쇠와 열쇠 구멍이 아니라면 무언가 융통성 있는 것들끼리의 조합을 염두에 두고 자신의 몸을 바꾸어간다. 어쩌면 그렇게 진화되어 가는지도 모르겠다.


플라톤 시대에 인간이 왜 인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지, 사랑이 왜 남과 여만의 공유물만은 아닌지. 남과 남, 여와 여의 사랑 즉 동성애도 온전함에 대한 추구임을 그 시대의 아리스토파네스는 보여준다. 두 사람이 한 몸이었던 때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는 두 머리를 하나의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려면 양보와 타협이 필요했을 것이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찾아 퍼즐판을 완성하는 과정이 바로 인류 역사가 아니었을까? 결국은 결여가 만들어낸 결과를 진화라 할 수 있고 사랑은 그러한 결여의 결과 시작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사이먼 리치(simon rich) 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가 ‘대다수 인간’을 빠뜨리고 있다고 말한다. 아주 짧은 단편 “티끌의 아이들” the children of the dirt'에서 리치는 여성-여성 짝을 ‘땅의 아이들’ 남성-남성 짝을 ‘태양의 아이들’ 그리고 이성 짝을 ‘달의 아이들’이라 부른다. 그는 나아가 처음부터 머리 하나에 팔다리 넷을 가지고 있던 ‘티끌의 아이들’도 있다고 말한다. 제우스는 이미 그들이 충분히 고통받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을 반으로 나누지 않았다. 리치에 따르면 오늘날 “인류의 대다수는 티끌의 아이들의 후손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세상을 뒤진다고 한들 그들은 찾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에는 그들을 위한 누구도, 어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그들을 위한 누구도, 어느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는 사이먼 리치의 견해에 밑줄을 긋는다.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다고 생각하기에 반으로 나누지 않은 티끌의 아이들인 우리는 무엇을 찾아 헤매고 있을까. 충분히 고통받았다는 그 고통의 근원을 헤아리고 있는 것일까.

충분히 고통받고 태어난 티끌의 아이들....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기에 반으로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은 여전히 충분히 고통스럽다. 그래도 고통 없는 세상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이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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