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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시간과 습한 시간들의 기억

진흙 사람들, 우리 몸 어딘가에 흙의 기억이 존재한다

진흙 사람들


영어의 ‘Man’, ‘Human’은 '흙'이란 뜻의 라틴어' 'Humus' 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인간의 어원이 습기와 관

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흙으로 빚고 흙으로 돌아갈 인간의 운명을 보여준다.

흙의 인간. 빚어진 인간, 그리고 흙으로 돌아가는 인간.

초등학교 미술시간 진흙을 맨 처음 만지던 날, 진흙으로 만든 최초의 작품들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왜 사람을 만들고 싶어 할까?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지만 사람이 사람을 만드는 작업은 본능적인 유희다.

물렁물렁한 갈색이 진흙을 굴려 몸통을 만들고 팔과 다리를 붙이고 그 위로 동그란 머리를 올리고 눈, 코, 입을 붙이던 생각이 난다. 뼈대를 세우지 않은 진흙 사람은 머지않아 허물어졌고, 뼈대를 세웠다 해도 제대로 다듬지 않은 연결 부위가 떨어져 나오거나 진흙이 마르면서 갈라져 볼품없는 모습이 되곤 했다. 진흙 사람에도 습기는 필수였다. 진흙 사람을 크게 만들면 만들수록 더 많은 물기가 필요했다. 촉촉하지 않은 진흙 사람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해가 비치는 창가 쪽에 진열되어있던 진흙 사람들. 갈라지고 여기저기 균열이 생긴 진흙 사람들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수시로 물을 발라주어야 했다. 순간의 촉촉함이 임시방편에 불과하더라도 진흙 사람의 몸이 따로 분리되어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신라 토우(土偶)는 흙으로 만든 인형인데 무덤을 발굴하면서 부장품으로 출토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사후세계를 삶의 연장으로 인식했던 고대 신라인들은 죽어서도 현세에서와 마찬가지로 안락하고 복된 삶을 영위하기를 소망했다. 신라 토우는 크기가 대략 5cm 정도지만 사실적이고 대담한 표현이 인상적이다. 인간 삶의 희로애락을 담고 있는 토우는 단순해 보이지만 단순하지 않은 의미를 품고 있다.

지나치게 단순해서 아무라도 쉽게 만들 것처럼 보이는 토우를 맨 처음 만든 이는 누구였을까?

죽어서도 현세와 같이 늘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까. 민망할 정도의 대담함과 날것의 원초성을 지니고 있는 토우. 사람의 모든 것을 벗겨내고 벗겨내면 토우에서 구현하고 있는 본질에 이르게 될 것만 같다.

신라인들의 토우가 5cm 남짓이었던 것은 부장품이었던 이유도 있지만 부서지거나 갈라짐을 최소화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최소한의 크기 안에 담긴 최대한의 욕망들. 진흙인간을 빚는 신라인의 마음이 되어본다. 나는 지금 이토록 오랜 시간 무엇을 빚고 있는가?


신라토우.jpg


<진흙의 사람 >


아일랜드에서는 이런 점을 친다지

접시에 반지, 기도서, 물, 진흙, 동전을 담아

눈을 가린 술래에게 하나를 집게 하는데

반지를 집으면 곧 결혼하게 되고

기도서를 집으면 수도원에 가게 되고

물을 집으면 오래 살게 되고

진흙을 집으면 곧 죽게 되고

동전을 집으면 엄청난 부자가 된다지

내가 집어 든 것은 진흙,

차갑고 축축하고 부드러운 질감이

손끝에 느껴질 때

그것이 죽음이 만져지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조금 놀라기도 하지

그러나 우리는 오래전 진흙으로 빚어진 사람,

아침마다 세수하며 그 감촉을 느끼곤 하지

물로 씻어내는 동안 조금씩 닳아가는 진흙 마스크를

잘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하루를 시작하지

아일랜드에 가지 않아도

반지, 기도서, 물, 진흙, 동전을 담은 접시는

식탁이나 선반 위에 늘 놓여 있지

내가 집어 든 것은 진흙,

그것으로 빚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고

진흙이 마르는 동안 갈라지는 슬픔 또한 기다리고 있으니

나는 눈 어두운 진흙의 사람,

그러니 내 손이 진흙을 집어 들더라도

부디 놀라지 말기를!

가렸던 눈을 다시 뜬다 해도

나는 역시 한 줌의 진흙을 집어 들 것이니!

나희덕



진흙을 집으면 곧 죽게 된다는 예언은 사람이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명징한 상징처럼 보인다.

습기가 사라진 진흙 사람이 쉽게 부서지듯 습기를 잃어버린 사람들도 쉽게 무너진다.

사람다움이란 습기를 지니는 것, 촉촉해지는 것, 눈물의 가치를 아는 것, 눈물을 외면하지 않는 것이다. 마음껏 울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 눈물의 힘을 믿는 자가 진짜 사람인지 모른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가장 작은 바다는 언제든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울 수 있게 마련된 수조인지 모른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이라는 말에 ‘사이’라는 말이 연결되면 관계의 언어가 된다. 습한 사람과 습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이, 메마른 사람과 메마른 사람이 만들어내는 사이. 사이들이 모여 인간이 된다. 사람(人)과 인간(人間)이 주는 느낌은 다르다. 어떤 날 나는 사람으로 서고 또 어떤 날은 인간으로 서는가. 거울 앞에서 마주하는 나는 습도계가 고장 난 사람이면서 늘 메마른 습도를 유지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오늘’이라고 적힌 페이지에 나를 기록하고 있다. 사람이면서 인간인 나의 기록은 건기와 우기를 반복한다. 짧은 건기와 긴 우기, 긴 건기와 짧은 우기, 메마른 시간과 습한 시간들의 기억. 삶은 건기와 우기의 반복이다. 나를 위해, 누군가를 위해 준비된 습도. 흙의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습도와 온기를 잃어버린 내 안의 습도계는 오작동 중이다. 울어야 할 때 제대로 울지 못하고 울고 싶을 때 울음을 견디는, 울지 않아도 되는 날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대책 없는 습도계의 주인이다.


창가 옆 진흙 사람들은 학기가 끝날 무렵이면 모두의 관심에서 벗어났다. 팔과 다리,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게 마구 뒤섞인 진흙 사람들... 습도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최후처럼 보였다.

우리는 모두 흙에서 온 존재이며 언젠가는 흙으로 돌아갈 존재들이다.

우리의 몸 어딘가에 흙의 기억이 남아있기를.... 흙의 온기와 습도를 간직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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