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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우리'가 '우리'를 길들이는 것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우상의 눈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 우상의 눈물/전상국 -

각각의 시대는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대한 인식의 틀을 사용한다. 미셀 푸코는 이를 ‘에피스테메’라 칭하며 과거의 권력은 겉으로 드러나는 잔인한 방식을 통해 대중을 통제하였다면 현대의 권력은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게 개인의 행동을 규제한다고 말한다. 통제의 주체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통제 방식이 때로는 더 폭력적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폭력은 신체적 손상, 정신적,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물리적 강제력이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의 폭력이 벌어질 때 맞서거나 저항할 수 있다. 하지만 선의로 포장된 은밀한 폭력, 더구나 이러한 폭력이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묵인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될까? 선의로 포장되고, 적당히 미화되어 폭력의 주체가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고 폭력인지 조차 모호할 때 우리의 힘은 어디로 향하게 될까?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고등학교 2학년 교실을 배경으로 기표와 재수파에 의해 자행되는 ‘신체적, 물리적인 불법적 폭력'과 담임과 반장 형우에 의한 치밀하고 합법적인 폭력'의 대립을 유대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선의를 가장한 폭력이 한 개인의 삶에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 우리‘라는 공동체가 ’ 자율‘을 내세워 하나로 뭉칠 때, 뭉쳐질 수 없는 개인을 길들이는 과정이 얼마나 잔인한가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신학기 첫날 담임은 ‘나무를 전정할 때 역행 가지를 잘라버리듯 항해에 역행하는 놈은 스스로 엄단해야 한다’며 ‘자율’을 강조한다. 유대는 ‘자율’을 말하면서도 제왕처럼 군림하고자 하는 담임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끼며 “우리가 탄 배의 선장은 누구냐”라고 묻는다. ‘자율’을 강조한다면 그 배의 선장은 당연 학생들이어야 하지만 담임은 반장 형우를 내세워 타율화된 ‘자율’을 행사한다.

기표는 재수파의 수장으로 학교 내 외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폭행 사건의 주동자였지만 감히 건드리기 어려운 성역과도 같은 존재였다. 동물 영화에서 밀림을 달리는 맹수들이 리더를 중심으로 한 방향으로 달려가듯 재수파들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이었다. 아이들이 두려워한 것은 ‘최기표’라는 개인보다는 ‘우리’라는 이름의 재수파들이었을 것이다. 담임은 무사안일한 ‘우리’의 항해를 바라는 또 다른 ‘우리’의 우두머리였고 형우는 일사불란한 항해를 위해 담임과 반 아이들에 의해 추대된 또 다른 ‘우리’가 만들어낸 우상이었다. 결국 기표, 담임, 형우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우상들이다.


어떤 의미에서 기표와 담임은 닮아있다. 담임은 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전면에 나서지 않으며 형우를 통해 반을 장악해나간다. 기표는 악의 정점에 있으면서도 감히 기표를 주동자로 언급할 수 없는 구조를 만들어간다. 담임이 합법적 권위로 형우를 이용하듯 기표는 힘의 논리로 재수파를 장악한다. 담임은 또한 형우와는 별개로 유대에게도 ‘항해에 방해가 될 역행 가지를 귀띔해주기를 바라지만 유대는 1년 전 ’ 우리‘를 위해 자신이 쓰이고 있다는 기쁨이 결국 따돌림으로 돌아왔던 뼈아픈 경험을 떠올리며 거부한다.

커닝 사건으로 어설프게 기표를 길들이려 했던 대가로 형우는 전치 2주의 폭행을 당하지만 폭력의 주동자가 최기표와 재수파란 것을 끝내 밝히지 않음으로써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재수파들을 기표로부터 등 돌리게 만든다.

담임이 준비한 체육복을 커터칼로 잘라 버리고 다른 아이의 것을 당당하게 빼앗아 입는 기표의 모습은 가난에 대한 값싼 동정에 저항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도무지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기표가 어느 날 갑자기 무서워서 견딜 수 없다는 편지를 남기고 가출해버린다. 기표가 무서워서 살 수 없다고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합법적이고 조직적인 장악, 상대의 치부를 드러낸 뒤 선행으로 포장하려는 야만이었을 것이다. 담임과 형우가 저지르는 폭력은 기표와 재수파들이 담뱃불과 깨진 유리병으로 저지르는 폭력과는 다르다. 재수파들의 폭력이 날 것 그대로의 폭력이라면 담임과 형우의 폭력은 치밀하게 계산된 선으로 포장된 ‘폭력’이다.


기표는 신화적 존재로 군림해 온 자신을 ‘빈곤’의 이름으로 발가벗기려는 형우의 교활한 혀가 무서웠을 것이다. 형우는 재수파들은 피를 팔아서까지 친구를 돕는 의리 있는 존재로, 기표는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전형으로 묘사한다. 교탁 앞에서 막힘없이 터져 나오는 형우의 현란한 언어들은 ‘우리’를 뭉치게 하는 마법으로 작동한다. 진짜 가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아이들은 선행의 결과에만 집중하고, 그들의 선행은 미화되고 포장되어 사회 각계각층의 동참을 이끌어낸다. 급기야 기표와 재수파의 이야기를 영화화하려는 구체적인 일정까지 잡힌다.

형우가 전치 2주의 상처를 입고 2주 만에 퇴원했을 때 불안한 표정으로 기표가 펼치고 있었던 책은 공교롭게도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었다. 안톤 슈낙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서 동물원에 잡힌 범의 불안 초조가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고 말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가를 왔다 갔다 하는 범의 그 빛나는 눈, 그 무서운 분노, 그 괴로운 부르짖음, 그 앞발의 한없는 절망, 그 미친 듯한 순환,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고.

3월 초 담임의 말대로 역행하는 가지들을 잘라버린 결과 들판을 달리던 범이었던 기표는 동물원에 갇혀 규칙적으로 투입되는 먹이를 갈구하는 양순한 범이 되어버렸다. 겉으로 보기엔 일사불란한 항해였으며 자율의 힘으로 역행하는 가지를 잘라버린

노력의 결실이었지만 기표에게는 그것이 도저히 무서워서 견딜 수 없는 공포가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베푸는 선의 혹은 호의가 아무리 좋은 의도라 할지라도 적정 수준을 넘어서면 상대방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담임은 주도 면밀한 계획 하에 아무 문제없는 반을 만드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합법적인 권위를 토대로 은밀하게 진행된 폭력이 교실을 뛰쳐나간 기표의 삶에 앞으로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항해를 하기 위해서 개인의 행동이 ‘우리’의 질서에 어긋날 때 ‘우리’는 개인을 어떻게 길들이는가? ‘우리’ 수준에서 적정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으로 상대의 약점과 치부를 드러내어 선행으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에게는 도저히 씻을 수 없는 고통이 될 수 있음을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은 말하고 있다.


안톤 슈낙의 말처럼 무엇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떤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어떤 폭력은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시킬 명분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런 폭력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천일 영화사에서 영화를 찍기로 했는데 못 찍게 되었다며 “망할 새끼가 끝까지 말썽이다.”라고 말하는 담임의 모습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선행으로 포장된 부정행위를 시도한 아이들이 모두 일어나 “접니다”를 외치는 과장된 우정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허벅지에 진물이 나고 전치 2주의 상처를 입고도 마치 그것이 당연히 거쳐야 할 훈장이라도 되는 듯 생각하는 유대와 형우의 태연함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무대 뒤에서 실을 늘여 뜨려 형우라는 꼭두각시를 통해 반을 장악하면서도 계속 줄기차게 자율을 주장하는 담임의 이중성이, 반 아이들과 재수파를 다루는 형우의 능수능란함이, 결국은 기표가 표적이 되리란 걸 뻔히 알면서도 문제 제기만 툭툭 던지고 마는 유대의 방관자적 모습이 우릴 슬프게 한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우상이 무너지고 그 우상을 무너뜨린 누군가가 또 다른 우상으로 군림하게 되는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세상이 무서워서 살 수 없다며 흘린 누군가의 눈물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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