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은 틈을 부른다. 얼마나 오랫동안 틈을 유지해야 할까...
< 틈 >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서로 힘차게 껴안고 굳은 철근과 시멘트 속에도
숨 쉬고 돌아다닐 길은 있었던 것이다
길고 가는 한 줄 선 속에 빛은 우겨지고
버팅겨 허리를 펴는 틈
미세하게 벌어진 그 선의 폭을
수십 년의 시간, 분, 초로 나누어본다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서울, 거대한 빌딩의 정글 속에서
다리 없이 벽과 벽을 타고 다니며 우글거리고 있다
지금은 화려한 타일과 벽지로 덮여있지만
새 타일과 벽지가 필요하거든
뜯어보라 두 눈으로 확인해 보라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 틈, 틈, 틈틈틈틈틈......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김기택 -
* <바늘구멍 속의 폭풍> 문학과 지성, 1994
세상 어디에든 틈이 있다. 빈틈없는 사람이란 말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아무리 빈틈없이 살고 싶어도 틈이란 언젠가 생기게 마련이다. 틈은 약한 것들 사이에선 그들의 등을 밀어주던 힘이 다. 틈이란 약한 것들이 모여 사는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에서는 파괴의 존재가 아닌 여백 같은 것이다.
강한 것들 사이에서 틈은 강한 것들을 끝내 전복시킬 위험이 되기도 한다.
"튼튼한 것 속에서 틈은 태어난다.
......
아아, 얼마나 느리게 그 틈은 벌어져온 것인가
그 느리고 질긴 힘은
핏줄처럼 건물의 속속들이 뻗어 있다
순식간에 구석구석으로 달아나 숨을
그러나 어느 구석에서든 천연덕스러운 꼬리가 보일
틈! 틈 , 틈, 틈, 틈틈틈틈틈...... "
핏줄처럼 건물 속속들이 뻗어있는 틈을..... 우리는 보지 못한다. 고급 인테리어로 마감된 벽 뒤에 핏줄처럼 뻗어나가는 맹렬한 틈의 움직임을 알지 못한다.
틈은 틈을 부른다. 그리하여 틈. 틈. 틈틈틈틈틈..... 수도 없이 많은 틈이 생겨난다.
강한 것들 사이의 균열. 사소한 틈이 틈을 불러내고 마침내는 강하고 튼튼한 것들을 일시에 무너뜨린다. 만들어진 것들 사이에 생겨나는 틈이 위험 신호라면 존재하는 것들 사이에 생겨나는 틈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사람과 사람 사이. 틈, 흔들리는 존재들 사이에 생겨난 틈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때론 존재들 사이의 틈은 긴 문장의 공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지금은 틈이 필요한 시대다. 시멘트와 콘크리트 건물 사이에 핏줄처럼 뻗어나가는 틈이 아니라 존재와 존재 사이... 스스로 생겨나는 틈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만들어야 하는 틈..
얼마나 더 오랜 시간 틈을 만들어야 하고 얼마나 더 오랫동안 틈을 유지해야 할까?
아무도 알 수 없다. 틈조차도 알 수 없다. 우리가 알 수 없어하는 사이 알 수 없는 틈이 자꾸만 생겨난다.
틈과 틈 사이. 바람이 지나간다./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