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의 전이 / 아름다움은 '알음다움'이다/피카소가 모나리자를 그린다면
시선의 전이 : 예술은 더 이상 망막적이지 않다.
- 피카소가 모나리자를 그린다면 -
우리는 늘 주변의 모든 것을 익숙한 방식으로 바라보려 한다. 어떤 대상을 위에서 아래로 훑어보기는 쉽지만 아래에서 위로 거슬러 보기란 쉽지 않다. 하나의 사물을 보더라도 다른 시각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망막을 통해 인식된 정보만을 진리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모나리자’라는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어떤 모습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눈썹이 없고 동그랗고 후덕한 얼굴, 풍만한 몸, 전체적으로 검은색 톤으로 채색된, 여성인지 남성인지 모호한 중성적 얼굴의 알듯 말 듯 미소를 띠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떠올릴 것이다.
프랑스의 예술가 표트르 바르소니는 ‘피카소가 모나리자를 그린다면’이란 책에서 고전적인 의미의 모나리자가 아닌 낯선, 다양한 이미지의 모나리자를 보여준다. 소개된 31명의 화가들의 독특한 화풍을 빌어 개성적인 방식으로 모나리자를 표현하고 있다. 점, 선, 면, 그리고 입체, 색조, 느낌과 감정에 따라 기존의 모나리자는 수없이 분해되고 재조합되면서 새로운 모나리자로 탄생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모나리자. 인상주의자들이 구현한 모나리자, 대중 예술가인 앤드와홀의 모나리자. 미니멀리즘이 추구하는 모나리자. 앙리 마티스의 모나리자, 고흐의 모나리자. 세잔의 모나리자... 수많은 모나리자. 모두 모나리자를 구현하고 있지만 개별화된 모나리자다.
내 시선을 잡아끈 모나리자는 당연 야수파 화가 앙리 마티스 스타일로 재구성된 모나리자다.
앙리 마티스는 “ 내가 초록색을 칠한다고 해서 풀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파란색을 칠한다 해서 하늘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스타일로 구현된 모나리자는 도전적이다. 연둣빛 노랑으로 야수처럼 강렬한 색채를 표현하였다. 갸름한 볼, 핑크색 볼터치, 계란형 얼굴에 창백한 피부, 옆으로 긴 눈에 갈색 눈동자. 쏘아보는 듯한 시선, 냉소적으로 보이는 입술....
“어떤 모나리자가 마음에 드는가?"라고 물을 수는 있지만 "어떤 모나리자가 가장 아름다운가? "라는 질문은 부적절하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예술은 전쟁, 혁명, 돈, 문화, 쟁탈, 화합과 같은 사회적 요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예술 작품은 사회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사물을 바라보는 데 있어 시선의 전이’는 중요하다. 창작 행위는 기존의 아름다움을 전복하고 자기만의 낯선 방식으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호기심 어린 도전이다.
신영복은 ‘담론’에서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앎’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인간에 대하여, 사회에 대하여 삶에 대하여 각성하게 하는 것이 알음다운 것이다.”라고 말한다. 미의 기준은 ‘알음’에 있다는 것. 그의 말처럼 ‘알음다운’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아야 한다.
다다이즘의 주장처럼 오늘날의 예술은 더 이상 망막적이지 않다. 예술은 단지 눈으로 감상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 담긴 생각을 오감을 통해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 칸딘스키는 미술작품은 눈으로 보는 대신 귀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말레비치와 같은 절대주의자들은 새로운 것을 다시 시작하려면 미쳐야 하며, 과거를 백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니멀리즘은 추상표현주의와 팝아트의 강렬한 색상과 이미지에 반대하고, 달리의 초현실주의는 이성에 의한 어떤 통제도 받지 않으려 했다. 이처럼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반대되는 것들을 만들어가는 이유는 전진하고, 탐구하고, 존재하고, 자신과 사회에 말을 걸기 위해서다. 앤디워홀의 모나리자는 대량 소비, 대량 생산의 공산품과 같은 예술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오늘날 소비와 생산 사회의 단면을 드러낸다.
예술이란 눈에 보기 좋은 것, 아름다운 것, 편한 것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망막에 찍힌 불편한 것들을 들어오는 대로 찍어내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행위 또한 예술일 것이다. ‘레디메이드’ 라는 새로운 예술 세계를 구현한 마르셀 뒤샹의 작품명은 ‘모나리자’가 아닌 ‘ LHOOQ' 즉 '엉덩이가 뜨거워'이며, 미니멀리즘의 조셉 코수스는 화폭에 '미소짓다'라는 말을 적어서 관념적인 모나리자를 구현하였다. 수많은 화가들이 창조한 모나리자는 모나리자이면서도 모나리자가 아닐 수 있다. '알음다움'을 느끼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선의 전이가 필요하고 망막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세상과 사물을 단지 익숙한 눈으로 보는데 그치지 않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보는 과정을 통해 저마다의 ' 알음다운 모나리자’를 형상화할 수 있을 것이다./ 려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