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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멸과 생성, 자기 안의 '금각'을 태우는 일

미사마 유키오.. <금각사>

마음이 불편한 소설이 있다. 불편한데도 몇 번이고 읽고 싶은... 몇 번이고 읽어도 늘 처음 읽는 것처럼 낯선... 책꽂이 어딘가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스산해지는 그런 소설. 책을 덮고서도 한참 동안 가슴에 쓰린 흔적인 남는 소설...

마음이 불편해진다는 것은 이 소설이 분명 내 마음의 악한 부분을 자극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슴이 쓰리다는 것은 내 안에 미조구치.가시와기.쓰루카와... 그리고 금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늘 미시마 유키오의 책을 다시 꺼내 읽고 내 안에서 발화되는 악을 누르려하는지도 모른다. 온전하고 완전한 인간이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기에 불완전한 인간은 점화된 악에 대해 쉽게 무너지고 만다. 양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는 일, 자신의 악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늘 어렵다.      


『금각사』는 탐미 문학의 대가이자 노벨문학상 후보로 세 차례나 거론된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대표작이다. 작품에서는 말더듬이에 추남이라는 콤플렉스를 안은 채 고독하게 살아가는 주인공 미조구치가 절대적인 미를 상징하는 ‘금각’에 남다른 애정과 일체감을 느끼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섬세하고 유려한 언어로 그려낸다. 미시마 문학 특유의 미의식과 화려한 문체, 치밀한 구성으로 유명한 《금각사》는, 1950년에 일어난 실제 방화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어 쓰인 ‘시사 소설’이면서 미사마 유키오의 ‘고백 소설’이기도 하다. 필사적인 몸부림에 베일 것처럼 아름다운 작품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자로 여러 번 거론되었던 그는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남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긍지였기 때문에 무엇인가 남들을 이해시키겠다는 표현의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 남들 눈에 띄는 것들이 나에게는 숙명적으로 부여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고독은 자꾸만 살쪄갔다. 마치 돼지처럼 -      

절대적 미의 화신이었던 우이코에게 거절을 당하고, 이어서 벌어지는 우이코의 죽음 이후  미조구치에게는 ‘우이코’가 ‘금각’처럼 존재한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금각사의 도제가 되고 그곳에서 쓰루카와라는 양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과 우정을 쌓아간다. 우연히 산책 나갔다가 출진하는 사관과 임신한 여자의 이별 장면을 보면서 그녀를 우이코의 환생이라 생각하였다. 병든 아버지를 두고 다른 남자와 관계하는 어머니에 대한 미조구치의 반감. 금각사의 주지가 되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당부 또한 희망이라기보다는 지나친 욕심으로 여겨진다. 

미군의 통역을 맡아 금각사를 안내해주다가 뜻하지 않는 사건에 휘말리는데 바로 이 사건이 미조구치 내부의 ‘악’이 발화되는 첫 사건이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임신한 작부의 배를 미군의 명령으로 밞으면서 알 수 없는 쾌감을 느끼고 대가로 받은 담배를 주지에게 전해주면서 “과연 악은 가능할까?”란 의문을 최초로 품게 된다. 악행의 대가로 받은 담배를 주지에게 뇌물로 주고 묵인하는 주지의 태도에서 미조구치는 묘한 감미로움, 악의 쾌감을 느낀다. 악의 광채가 저마다의 가슴 안에 훈장처럼 자리 잡고 있다가  어느 틈엔가 튀어나온다. 


'밟아. 네가, 밟아봐!' 무슨 소린지 나는 몰랐다. 하지만 그의 파란 눈은 높은 곳에서 명령하고 있었다. 그의 넓은 어깨 뒤에는 눈에 덮인 금각이 빛나고, 씻어낸 듯이 파란 겨울 하늘이 촉촉이 어려 있었다. 그의 파란 눈은 조금도 잔혹하지 않았다. 그것을, 그 순간, 세상에서 가장 서정적이라고 느낀 것은 어째서일까? (……) 저항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고무장화의 발을 들었다. 내 발은 내려와, 봄날의 진흙처럼 부드러운 물체를 밟았다. 그것은 여자의 배였다. 여자는 눈을 감은 채 신음했다.     


오타니 대학에서 가시와기 와의  만남. 가시와기는 인식의 세계에 안주하며 ‘미지의 인생’을 경멸하는 존재다.

“ 불안도 없어, 사랑도 없어. 세계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도달하고 있는 거야.”

안짱다리라는 선천적 장애를 지닌 가시와기는 신체적 ‘불완전함’을 무기로 '완전한 것‘들을 파괴한다. 미모의 갖추어진 여자들을 농락하거나 미조구치에게 금각 주변의 꽃을 꺾어 오라거나 금지된 곳에서 퉁소를 분다거나.. 미조구치는 가시와기를 통해 '악의 인식'에서 ' 악의 실행' 단계로 진입한다.

그래도 산다는 것이 곧 '파멸'을 의미하는 가시와기를 닮고 싶지는 않았기에 금각에게 자신을 지켜달라고 고백한다. 

 가시와기와 함께 아라시 산에 놀러 가 하숙집 딸의 하녀와 관계를 맺으려는 순간 금각이 나타난다. 그 후에도 꽃꽂이 선생과 또다시 관계하려는 순간 금각이 나타난다.

 “ 또다시 나는 인생으로부터 격리되었다. 또다시 금각은 어째서 나를 보호하려는 것일까. 원하지도 않는데 어째서? 나를 내 인생으로부터 격리시키려 하는가?

금각은 내가 지옥에 떨어진 것을 구해주려 한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지옥에 떨어진 인간보다 더 나쁜 ‘ 누구보다도 지옥의 사정에  밝은 사내'로 만든 것이다. “

금각이 보였다. 금각은 한 밤중에도 결코 잠드는 법이 없이 서있었다. 마치 밤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 언젠가 반드시 너를 지배할 테다. 두 번 다시 방해하지 못하도록. 언젠가는 반드시 너를 내 것으로 만들 테다.”

미조구치는 금각에게 소리친다.     

영원의, 절대적인 금각이 출현하여 내 눈이 그 금각의 눈으로 변할 때 세계는 이처럼 변모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변모한 세계에서는 금각만이 형태를 유지하고 미를 점유하여 그 밖의 것들은 흙먼지로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이 이상 장황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이전에 금각의 정원에서 창녀를 밟은 이후로, 또한 쓰루카와가 급사한 이후로 내 마음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되풀이했다. '과연 악은 가능할까?'      


P. 276~277

문득 나는 가시와기가 처음 만났던 날 나에게 한 말이 기억났다. 우리들이 갑자기 잔학해지는 것은 화창한 봄날의 오후, 잘 깎인 잔디밭 위에서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온 햇빛이 여기저기 비치는 모습을 무심코 바라보고 있을 때 같은 순간이라고 했던 말이.

(……) 돌연히 나에게 떠오른 상념이 가시와기의 말처럼 잔학한 상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상념은 느닷없이 나의 몸속에서 생겨나, 아까부터 떠오르던 의미를 계시하며 환하게 나의 내부를 비추기 시작했다. 생겨남과 동시에 강력하고 거대해졌고, 오히려 내가 그것에 감싸였다. 그 상념이란 이런 것이었다. '금각을 불태워야 한다.'  

말더듬이가 첫마디를 소리 내기 위해서 몹시 안달하는 동안은 마치 내부 세계의 농밀한 끈끈이로부터 몸을 떼어내려고 버둥거리는 새와 흡사하다. 겨우 몸을 떼어냈을 때에는 이미 늦은 것이다. 물론 외부 세계의 현실은 내가 버둥거리는 동안 휴식을 취하며 기다려줄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기다려주는 현실은 이미 신선한 현실이 아니다. 애써 간신히 외부 세계에 도달해봐도 언제나 그것에는 변색되어 어긋나 버린... 더구나 그것만이 나에게 어울릴 듯이 여겨지는 신선하지 못한 현실, 거지반 썩은 냄새를 풍기는 현실이 가로놓여 있을 뿐이었다.      


주지에게서 받은 수업료를 들고 어딘가에, 어디든지, 어떤 부도덕이든 도달해버리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일부러 유곽에 가서 육체를 소진하고... 이상하게도 이때는 금각이 나타나지 않았다.  오로지 마지막 목표 금각을 불태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노사의 말없이 베푸는 은혜는 거짓으로 가득한 노사의 분홍빛 살과도 같았다. 배신에 대하여 신뢰로, 신뢰에 대하여 배신으로 대처하는 살. 부패에도 침범당하지 않는 분홍빛 살..

왜 부도덕한 노사를 응징하려 하지 않고 금각을 불태우려 하는 것인지 미조구치 자신에게 물었다 

노사의 무력한 악은 끊임없이 번식하리 하는 것.. 모름지기 생명 있는 것들은 온갖 속성을 대체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것을 전파하고 번식시키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금각은 오히려 멸망의 가능성이 느껴졌다. 인간처럼 필멸하는 것들은 결코 근절되지 않으며 금각처럼 불멸인 것은 소멸시킬 수 있다. 메이지 30년대 국보로  지정된 금각을 블태운다면 순수한 파괴, 돌이킬 수 없는 파멸,  인간이 만든 미의 전체 무게를 확실히 줄이는 것이 된다.       


<금각사>에서 ‘남천 참묘’에 대한 이야기가 3번 언급된다.

남천참묘 ’는 당나라 남천사의 보원선사라는 명승, 남천스님이라 불리는 그의 일화다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두고 동서양당이 다툼을 벌이자 올바른 해결책을 구하지 못하면  고양이를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중들이 대답을 못하자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수제자인 조주가 늦게 돌아오자 남천 스님은 조주의 의견을 물었다

조주는 곧바로 신고 있던 신발을 벗어 머리 위로 올린 채 나가버렸다.

남천 스님이 고양이를 고양이를 밴 것은  자아의 미망을 끊어 망상의 근원을 제거하기 위한 행동, 비정한 실천으로 고양이의 목을 자름으로써 일체의 모순, 데립, 자타의 확집에서 벗어나기 위함. 살인도(殺人刀), 조주는 흙투성이가 되어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신발을 무한한 관용에 의해 머리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보살도(菩薩道)를 실천한 것이다.     


''남천참묘'라. 남천 스님이 베어버린 그 고양이가 예사롭지 않지. 고양이는 아름다웠단 말이야, 알아? 이를 데 없이 아름다웠지. 미라는 것은 마치, 뭐라고 할까, 충치 같은 거야. 그건 혀에 닿아 신경 쓰이고 아프게 해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 (……) 고양이를 벤 것은 마치 아픈 충치를 빼내서 미를 척결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그것이 최후의 해결책이었는지는 알 수 없어. 미의 뿌리는 근절되지 않았고, 설령 고양이는 죽었어도 아름다움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이토록 해결이 안이했던 것을 풍자해서 조주는 그 머리에 신발을 올려놓았지. 그는 충치의 아픔을 참는 것 외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야.'

나는 처음으로 가시와기에게서 진정한 두려움을 느꼈다. 잠자코 있기가 두려웠기에 다시 되물었다. '너는 그러면 어느 쪽이냐? 남천 스님이냐, 아니면 조주냐?' '글쎄, 어느 쪽일까. 지금으로서는 내가 남천이고 네가 조주지만, 언젠가는 네가 남천이 되고 내가 조주가 될지도 몰라. 


금각을 태우기로 마음을 굳힌 미조구치는 다시 가시와기와 남천 참묘 이야기를 한다.     

“조주가 자신의 신발을 머리 위에 올린 것. 조주가 하려던 말은 아마도 미가 인식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야 한다는 거야. 하지만 개개의 인식, 각각의 인식이란 존재하지 않아.  너는 이제 와서 남천이 되려는 거니? 네가 좋아하는 미적인 것, 그건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인식에 위탁된 나머지 부분. 잉여 부분의 환영이야. 삶을 견디는 다른 방법의 환영일 뿐..”               


금각 앞에서 눈물을 터뜨리는 미조구치의 가슴에

“ 안으로 향하여 밖으로 향하여 마주치면 즉각 죽여보려라.... ”

<임제록> 시중의 유명한 구절이 연달아 떠올랐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조상을 만나면 조상을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친족을 만나면 친족을 죽여서 비로소 해탈을 얻노라.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말고 투탈자재해지리라.”

방화를 하는 순간 가슴은 마구 고동치고 손은 떨렸다. 불은 짚더미에 복잡한 그림자를 그리더니 밝고 메마른 들판에도 같은 색깔로 퍼져나갔다. 불을 지르고 금각의 3층 구경정에서 금각과 함께 생을 마치려 하였으나 구경정 문이 열리지 않았다. 금각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미친 듯 달렸다. 얼마나 쉬지 않고 달려 히다리 오모지 정상까지 내달았다

계곡 사이의 금각을 바라보았다. 폭죽 같은 소리가 났다. 무수한 인간의 관절이 일제히 울리는 듯한 소리처럼 들렸다. 도망쳐 나온 짐승처럼 상처를 핥았고 호주머니를 뒤져 단도와 칼모틴 병을  던져버렸다,

담배를 꺼내 물고는 일을 마친 사람들이 흔히 그러하듯 살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미조구치... 금각을 완전히 전소시켜버린 미조구치는 ‘살아야지’라고 중얼거린다

절대미의 금각, 우이코, 정복할 수 없는 것, 자기 내면의 제어할 수 없는 것. 이제 금각이 사라졌다. 

우이코를 만나면 우이코를 죽여버리고 금각을 만나면 금각을 죽여버린... 그리함으로써 해탈을 얻은 미조구치는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야만’한다.     


일본 교토에 갔을 때 여행가방에 제일 먼저 챙겨 넣은 책이 바로 『금각사』였다. 

실제로 일어난 방화에 소설적 장치를 가미시켜 탄생한 소설이라 그런지 허구가 실화처럼 느껴지는 책이다. 생각보다 아담한 건물이었다. 책에 묘사된 ‘금각사’를 나는 거대한 금각사로 상상하고 있었는데...

하염없이 금각을 바라보았다. 이국의 절. 연못에 비친 금각. 누군가 연못을 향해 돌을 던지자 물에 비친 금각의 형상이 일시에 일 그려졌다. 아무리 견고한 건축도.. 연못에 비친 이미지는 유연하다. 미조구치의 눈으로  금각을 바라보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그의 가슴을 전율케 한 어떤 절절함이 내게는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누구나 자기만의 ‘금각’을 품고 살아가리라는 생각을 했다. 자기 안의 ‘금각’이 자신을 어딘가로부터 격리시켜버리든,  어딘가로부터 벗어나게 하든, 어딘가로 빠져들게 하든...... ‘금각’이 하는 일.. 악의 제어와 악으로부터의 탈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악에 대한 탐닉...      

다시 교토에 가게 되면 오랫동안 금각 앞에 머물러 보리라.... 알 수 없는 답을 들으러. 내 안에 발화되지 못한 악을 잠재우러....../ 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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