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의 본질... 나의 본질을 읽는 일..
꽃을 위한 서시 / 김춘수
나는 시방 위험(危險)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無名)의 어둠에
추억(追憶)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塔)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金)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新婦)여.
꽃의 본질
본질을 인식한다는 것은 늘 어렵다. 삶에서 ‘본질’이라는 것은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게 마련이다. 5월 장미들.... 불어오는 바람에 꽃잎이 거침없이 날렸다. 빨간 꽃잎들 사이 감추어진 화사한 노랑은 사라지고 칙칙한 갈색... 커피 빛으로 말라버린 암술과 수술만 남았다. 벌도, 나비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는다.
바닥에 날린 빨강 꽃잎들. 바람이 가지를 흔들 때마다 흩날리는 것들은 장미의 꿈이었을까, 덧없는 한숨이었을까, 독백이었을까.
향기조차 마른 뜰. 본질을 은폐하던 빨강은 사라지고 말라버린 본질만 남아 단단히 가지를 붙잡고 있다. 꽃이 사라진 가지... 화석이 된 꽃받침은 뒤로 젖혀져있다.
모든 것이 드러나 있다. 그 마른 것들 사이에 지난겨울과 봄의 흔적들이 묻어있다.
박제된 꽃을 바라보는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미지(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에서 존재의 본질에도 다가가지 못한 채 일상에 매몰된 나는... 무명(無名)의 어둠 속에서 시속 화자차럼 한밤내 운다.
끝없이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존재를, 존재의 본질을 보여주는 한 철의 새빨간 장미 앞에서..
이미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비로소 자유로워진 장미 앞에서 나는 무엇을 바라 그리고 웅크리고 있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고독’과 ‘우울’의 유전자를 지닌 나는...날마다 내재된 고독과 우울의 사이를 거닌다.
‘꽃을 위한 서시’ 속 시적화자인 나는 존재의 어둠으로 가득 찬 세계를 ‘돌개바람’처럼 떠돌다가 견고해 보이는 ‘탑’을 흔들고... 그 흔들림이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시인은 마지막 한 줄을 덧붙였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라고...
존재의 본질을 찾는 일이, 그 본질에 다가서는 일이.. 결국은 얼굴을 가리운 신부 앞에서 있는 막막함으로 다가온다는 것일까. 비워버린 것들, 드러난 것들, 향기도 보드라운 잎사귀도 화사한 색도 모두 내려놓은 것들...
그 안의 본질을 읽으려 한다. 책을 읽듯 활자화된 본질을 읽어내려 한다.
존재라는 넓은 식민지 안에서 자기 과잉과 자기 결핍을 품고 살아가는, 살아가야 하는.. 그런 6월이다. 멀리서 새들이 운다. / 려원
<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