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쓰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1941. 4월 문장 3권 4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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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석(본명 : 백기행)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1912년 출생하였으며 1935년 조선일보에 ‘정주성을’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고 1996년 북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벽을 바라보는 일..누구나 한 번쯤 새하얀 벽을 바라본 적이, 혹은 바라보고 싶은 적이 있었으리라.

이 시는 회화적인 이미지에 충실하며 시, 청, 후, 촉, 미각적 이미지 오감이 풍부하게 드러나 있다.

어느 저녁, 좁다란 방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던질 때 때 묻은 낡은 무명샤쓰를 입은 시적화자는 흰 바람벽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달디단 따끈한 감주 생각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들이 지나간다.

그러다 문득 흰 바람벽이 스크린이 되어 가난한 늙은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시퍼러둥둥 추운 날 차디찬 물에 손 담그고 무, 배추를 씻는 가난한 늙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어여쁜 이가 보인다.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지아비와 마조앉아 대구국을 먹고 있다. 어린 것도 함께 앉은 단란한 저녁...

어느 순간 가난한 늙은 어머니,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은 사라지고

흰 바람벽엔 화자의 쓸쓸한 얼골이 보이고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

또다시 위로하듯 울력하듯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흰 바람벽 위로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달과 꽃과 새와 당나귀가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아가듯...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라고만 썼다면 흔하고 당연한 문구였을 텐데....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것 사이에 ‘높고’가 들어있다.

가난하고 외롭지만 ‘높아야’하기에 삶은 더 버거운 게 아닐까

흰 바람벽에 투영된 자기 얼굴을 바라보며 가난하고 외롭고 낮고 쓸쓸해지지 않기 위해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해야만 하기에 화자의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겁고 너무도 많이 호젓한 것이다.

가을이다. 9월에 접어든 게 어제만 같은데 벌써 9월의 중반이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여름의 태양이 묻어있긴 하지만 바람의 결이 달라지고 있다.

가난하지도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삶을 누구나 꿈꾼다.

그러나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태어난 시인은 ‘높고’라는 단어 한 마디에 힘을 얻으며 살아갔으리라...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높고 여전히 쓸쓸했으리라.

1941년에 써진 시를 2023년 가을에 읽는 기분은 새롭다.

백석은 세상에 없어도 여전히 그의 시는 남아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 하늘이 세상을 만들 적에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하였으니...,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게 하였으니../ 려원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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