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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붉은 석류 한 알에서

유폐된 붉음, 드러내지 못한  울음, 화석이 된 기억을 보았다.


붉은 벽돌 건물과 헝클어진 나목, 화석화된 석류 한 알은 미국의 대표적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잭슨 폴록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록 Jackson-Polloc

    연보랏빛 안개 no1 (1950)

     

캔버스 위에 페인트를 뿌리고, 떨어뜨리고, 던지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액션 페인팅기법(action painting) , 우연성, 순간성, 실험적 기법에 따라 예측할 수 없는 작품이 탄생한다.   

1947년 마룻바닥에 편 화포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드리핑' 기법을 창안했다. 바닥에 천을 놓고 막대기에 물감을 묻힌 뒤에 흩뿌리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형체는 보이지 않고 마치 실타래가 엉킨 것처럼 보이는 물감 자국만 남았다.  폴록은 완성된 결과물보다 흩뿌리는 과정 자체를 중시했다. 결과물만을 예술로 인정하던 시기에 제작 과정과 의도 또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결과물보다 과정이 예술로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대로라면

빨간 석류 한 알이 화석이 되어가는 과정

초록 잎이 지고 깡마른 나목으로 남은 과정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의 배경이 되어준 붉은 벽돌담의 조용한 노화,

쉬어가는 바람과 새들의 날갯짓, 햇살의 기울기, 그 나무를 우러러보는 이들의 시선까지도 예술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으리라. 연보랏빛 안개라는 낭만적인 이름 뒤에 숨은  정돈되지 않은 난해함은 내 머릿속 생각의 회로처럼 뒤엉켜있다. 안개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듯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우연과 순간이 만들어낸 형체다     


붉은 석류의 화석이 된 기억          


  < 석류 > / 이가림     

   언제부터

   이 잉걸불 같은 그리움이

   텅 빈 가슴속에 이글거리기 시작했을까     

   ....

   나 혼자 부둥켜안고

   뒹굴고 또 뒹굴어도

   자꾸만 익어가는 어둠을

   이젠 알알이 쏟아놓아야 하리          

   무한히 새파란 심연의 하늘이 두려워

   나는 땅을 향해 고개 숙인다

   온몸을 휩싸고 도는

   어지러운 충만 이기지 못해

   나 스스로 껍질을 부순다     

 .....   - 이가림,『순간의 거울』(창작과 비평사, 1995)       


   


유폐된 붉음, 드러내지 못한   울음을 보았다.

도서관 한 구석, 죽은 것처럼 보이는 오래된 석류나무. 벽돌 건물을 배경으로 한 마른  가지 사이... 겨우내 매달린 석류 한 알은 눈보라에도, 거센 비바람에도 떨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끝내하지 못해 화석이 된 사람처럼  벌리지도 못한 고운 입. 드러내지도 못한 빨강들. 산산이 부서진 빨강 알갱이들은 그 어떤 비밀도 끝내 발설하지 않았다.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처럼, 묵언수행을 하는 수도자처럼

한 여름 뜨거운 땡볕과 매미 울음소리, 풀벌레소리, 도서관의 적막, 이슬 내리는 밤, 쏟아지는 눈, 어둠과 어스름.. 그 모든 것을 붉은 자루에 담고 거침없이 끌어당기는 중력에 저항하며  그렇게 여러 계절을 지났다.     

우연과 순간이었을까. 필연과 지속의 힘이었을까.


아직 석류나무에 연초록 잎은 돋아나지 않았다.     


잉걸불 같은 그리움은 이미 꺼져버리고 허공에 매달린 마른 석류 한알이... 석류나무의 검붉은 심장처럼 보였다.  속으로 속으로 삼킨 것들이 뭉쳐 타버린 심장. 하고 싶은 말이 그리 많아서  끝내 견디고 있는 것일까.           


어둠이 스며들며 조금씩

온몸으로 퍼져가는 아픔과 회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서 지긋이 견딥니다 남은 생애를

헤아리는 것 또한 나에게 주어진

몫이려니 나의 육신이

누리는 마지막 행복이려니

그저 이렇게 미루어 짐작하고

땅거미 내릴 무렵

마당 한 구석에 나를 앉혀 둡니다

  -김광규 「땅거미 내릴 무렵」 부분


화석이 된 석류에게서 남은 생애를 혼자서 지긋이 견디는 모습을 본다

온몸으로 스며드는 어둠을 삼켜 더 검어진 혀로 더 이상 발설하지 않고 가슴 안에 새기고 삼키고  땅거미 내릴 무렵 그저 가만히 석종처럼 매달려 있다

끝은 아니라고 다만 이렇게 남아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바람이 분다. 제법 거세다

흔들리고 있겠지... 이 바람 속에...

발화되지 못한 그리움을 품고서........... 석종 같은 석류 한 알

잘 견디고 있을까.  

 한 편의 거대한 추상화처럼 한없이 난해한 봄날. 끝도 없는  그리고 방향 없는 우울 / 려원        

                                 


<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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