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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에 비치는 눈동자 속에 아버지가 산다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

거울을 볼 때마다 습관적으로 눈을 바라본다.

그 눈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검고 깊은 홍채 안에 피사체가 된 내가 들어있다

더 오래도록 

더 천천히

더 집요하게 들여다보면

그 깊은 곳, 검은 파도로 물결치는 곳에 아버지가 있다.

          

내 몸 어딘가에 여전히 그가 살아있기에 그는 부재하지 않다

아버지의 생물학적 유전자 gene과 문화적 유전자 meme을 모두 품고 있는 나는 날마다 거울을 통해 검은 눈동자를 통해 뿌리를 더듬는다.

     

3월 꼭 이 무렵이었을까. 동백이 피던 때. 여전히 그날의 기억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은

연어의 회귀본능처럼 당연한 것이다. 적어도 내게는...

어떤 이루지 못한 소망을 그곳에 남겨둔 것처럼 그리하여 나는 늘 허기진다.      

아마도 나는 아버지의 딸로, 아버지가 바라던 대로 자라주지 못함에 대한 죄스러움과 미안함을 품고 사는 것이리라. 대학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는 대학원 진학을 원하셨지만 나는 원서마감일까지도 고집스럽게 거부했던 기억....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직장에 다니면서 비로소 대학원에 입학한 나를 생각하면 어리석었다. 

    


거울에 비친 눈을 바라보며 참혹한 봄의 슬픔을 느낀다. 항상 나로 살겠다고, 나답게 살겠다고 외쳤지만

정작 그리 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 때문인가.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데미안』     

나의 첫 책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서문에 '헤르만 헤세'의 말을 옮겨 놓았던 것도

진짜 ‘나’ 제대로의 ‘나’로 살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이리라.     

아버지의 딸이 아닌 ‘나’로 살겠다는 외침보다 아버지의 딸이면서 그리고 제대로 온전한 ‘나’로도 살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거울 앞에서 내 눈동자 안에 여전히 젊은 아버지가 살고 계신다.

그러하기에 거울을 마주하는 나는 늘 부끄러운 것이다

여전히 내 안에 살면서 나를 바라보는 그가

결코 무한하지 않은 인생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묻는다.

아버지가 미처 살지 못한 남은 생까지 제대로 된 생을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 내가 아는 그는>
     

내가 아는 그는

가슴에 멍 자국 같은 새 발자국 가득한 사람이어서

누구와 부딪혀도 저 혼자 피 흘리는 사람이어서

세상 속에 벽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 일생을 벽에 문을 낸 사람이어서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마시는 사람이어서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지평선 같은 사람이어서

그 지평선에 뜬 저녁별 같은 사람이어서

때로 풀처럼 낮게 우는 사람이어서

.......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이어서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죽어도 죽지 않는 노래 같은 사람이어서


류시화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인용   부분발췌       


지금 이 시간 자판을 두드리며 

눈동자 안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은 오래전 아버지의 책꽂이를 더듬던 손의 기억 때문이다

오래전 아침을 깨우던 아버지의 경쾌하고 날렵한 타자소리 때문이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맡던 낡은 책 내음, 아버지가 웅크린 책상의 온기 때문이다

어딘지 고독하고 쓸쓸했던 아버지의 등 때문이다

무언가를 수없이 적어놓은 아버지의 푸른 잉크빛 글씨 때문이다.

여전히 놓지 못하는 부재,  연어의 회귀처럼 꼭 이맘때 동백이 피는 날이면 가슴을 저미는 

붉은 그리움 때문이다.

  

오늘 비 내리고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

아버지를 내 눈동자 안에서 발견한다. 마주한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잡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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