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루다의 우편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민음사
파블로 네루다(1904-1973)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시는 쓰는 사람이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나는 이 세계에서 자기 자신만의 시적인 언어를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어디선가 살해되고 박해당할지라도, 나는 이 책을 통해 그 잔혹한 괴물과 맞서 싸우고 싶었다.”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하나인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대표작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영화 '일 포스티노'로 제작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작품 자체가 하나의 메타포라 할 수 있는데 시인과 우편배달부 마리오를 통해, 한 편의 시가 새로운 삶과 사랑을 이끌어내는 장면을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소설은 어느 무명 저널리스트의 회고로 시작한다. 1970년대 초 칠레의 작은 어촌마을 이슬라 네그라에는 파블로 네루다에게 우편물을 전달하는 것이 유일한 업무인 젊은 우체부 마리오 히메네스가 있다. 아름다운 소녀 베아트리스를 보고 첫눈에 반한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소녀를 위한 시를 써달라고 조른다.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메타포를 가르쳐주고 베아트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한다.
마침내 결혼하게 된 마리오와 베아트리스. 이후 네루다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어 마을을 떠난 후에도 둘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이어간다.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네루다가 위험에 처했을 때 마리오는 목숨을 걸고 그를 찾아가 곁을 지킨다.
작가는 마리오의 개인적인 삶과 칠레의 냉혹한 정치사 사이에서 절묘한 평행선을 만들어낸다. 작가의 표현대로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 이야기는 칠레 민중들에게 바치는 헌사인 동시에 사랑과 시와 문학을 이야기하는 감동적인 노래이다.
- 책소개 발췌 -
이 작품의 원제는 ‘불타는 인내’는 1971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네루다는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리라.”연설문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P. 17
˝좋아. 이슬라 네그라를 담당할 우체부 직이야.˝
˝우연이네요. 제가 이슬라 네그라 옆 포구에 살거든요.˝
˝그것 참 잘됐군. 하지만 문제는 수신인이 단 한 사람뿐 이라는 거야.˝
˝한 사람뿐이라고요?˝
˝그렇다니까. 포구 사람들은 모두 까막눈이야. 계산서조차 못 읽으니까.˝
˝그 수신인이 누구죠?...
“파블로 네루다 씨”
이렇게 해서 마리오는 네루다의 전속 우편배달부가 된다
P 26
“무슨 일 있나? ”
“전봇대처럼 서 았잖아,”
“창처럼 꽂혀 있다고요.”
“아니, 체스의 탑처럼 고즈넉해.”
“도자기 고양이보다 더 고요해요,”
....
뭐라고요?'
'메타포라고!'
'그게 뭐죠?'
시인은 마리오의 어깨에 한 손을 얹었다.
'대충 설명하자면 한 사물을 다른 사물과 비교하면서 말하는 방법이지.'
'예를 하나만 들어주세요.'
네루다는 시계를 바라보며 한숨지었다.
'좋아. 하늘이 울고 있다고 말하면 무슨 뜻일까?'
'참 쉽군요. 비가 온다는 거잖아요.'
'옳거니. 그게 메타포야.'
'그렇게 쉬운 건데 왜 그렇게 복잡하게 부르죠?'
'왜냐하면 이름은 사물의 단순함이나 복잡함과는 아무 상관없거든. 자네의 이론대로라면 날아다니는 작은 것은 마리포사(스페인어로 나비)처럼 긴 이름을 가지면 안 되겠네. 엘레판테(코끼리)는 마리포사와 글자 수가 같은데 훨씬 더 크고 날지도 못하잖아.'
P 29
여기 이슬라 네그라는 바다, 온통 바다라네
순간순간 넘실거리며
예, 아니요, 아니요라고 말하지,
예라고 말하며 푸르게, 물거품으로, 말밥굽을 올리고
아니요, 아니요라고 말하네.
잠잠히 있을 수는 없네.
나는 바다고
계속 바위섬을 두드리네.
바위섬을 설득하지 못할지라도
푸른 표범 일곱 마리
푸른 개 일곱 마리
푸른 바다 일곱 개가
일곱 개 혀로
바위섬을 훑고
입 맞추고, 적시고
가슴을 두드리며
바다라는 이름을 되풀이하네
네루다가 사랑한 이슬라 네그라의 바다는 일곱 개의 혀로 입 맞추고, 적시고, 가슴을 두드리며 바다. 바다, 바다를 반복한다. 밀려오고 밀려가는 끝없는 파도의 변주 속
순간순간 넘실거리며 ‘예’ 그리고 ‘아니요’, ‘아니요’를 외친다.
예라고 말하며 푸르게, 물거품으로, 말밥굽을 올리고
아니요, 아니요라고 소리치고 있다.
바다가 ‘예’ 혹은 ‘아니요’라고 말한다는 상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내게 조용한 충격으로 다가온 시다.
p 30
"이상해요. “
“이상해요 ‘라니 이런 신랄한 비평가를 보았나.”
“아닙니다. 시가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시를 낭송하는 시간 동안 제가 이상해졌다는 거죠..”...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요, 시를 낭송할 때 단어들이 이리저리 움직였어요.”
“바다처럼 말이지!”
"네, 그래요. 바다처럼 움직였어요."
"그게 운율이란 것일세."
"그리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어요. 왜냐하면 너무 많이 움직여서 멀미가 났거든요."
"멀미가 났다고."
"그럼요! 제가 마치 선생님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
시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내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바로 그래요."
"네가 뭘 만들었는지 아니, 마리오?"
"무엇을 만들었죠?"
"메타포."
"하지만 소용없어요. 순전히 우연히 튀어나왔을 뿐인걸요."
"우연이 아닌 이미지는 없어."
시의 단어들이 이리저리 바다처럼 움직이고 출렁거리고 그 끝없는 움직임과 출렁임에 독자는 멀미가 난다.
우연이 만들어낸 이미지,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우연을 잘 붙잡아두는 것이 시 쓰기의 기본이 아닐까.
P. 42
˝저 사랑에 빠졌어요.˝
˝이미 말했잖아. 그래서 어쩌라고?˝
˝저를 도와주셔야만 합니다.˝
˝내가 이 나이에!˝
˝도와주셔야 해요. 소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소녀가 제 앞에 있으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 같아요.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
P. 45
˝하지만 나는 소녀를 알지도 못하는걸. 시인은 영감을 얻으려면 그 사람을 알아야만 돼. 아무것도 모르고 쓸 수는 없는 걸세.˝
"시인 동무, 당신이 저를 이 소동에 빠뜨렸으니 책임지고 저를 구해 주세요. 당신이 제게 시집을 선물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어요. 사랑에 빠진 건 당신 때문이에요."
"천만에! 시집 두어 권 선물했다고 내 시를 표절하라고 허락해 준 줄 알아. 게다가 자네는 내가 마틸데를 위해 쓴 시를 베아트리스에게 선사했어."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에요!"
"저를 버리시면 안 돼요. 과부에게 이야기해서 미쳐 날뛰지 말아 달라고 해주세요."
"이봐. 나는 시인일 뿐이야. 딸 가진 어머니의 오장육부를 녹이는 재주는 없다고."
"도와주셔야 해요. 선생님이 그렇게 쓰셨잖아요."
지붕 없는 집도 유리창 없는 창도 싫네.
노동 없는 낮도 꿈이 없는 밤도 싫네.
여인 없는 남자도 남자 없는 여인도 싫네.
남녀가 얽혀 그때껏 꺼져 있던
키스의 불꽃을 불태웠으면 좋겠네.
나는야 유능한 뚜쟁이 시인.
"지금 와서 이 시가 부도 수표라고는 말씀 못하시겠죠.
p 77
'벌거벗은 ‘당인은 그대 손만큼이나 단아합니다.
보드랍고 대지 같고 자그마하고 동그랗고 투명하고
당신은 초승달이요 사과나무 길입니다 ‘
‘벌거벗은’ 당신은 밀 이삭처럼 가냘픕니다.
‘벌거벗은’ 당신은 쿠바의 저녁처럼 푸릅니다.
당신 머릿결에는 메꽃과 별이 빛납니다.
‘벌거벗은’ 당신은 거대하고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여름날의 황금 성전처럼
마리오는 네루다가 자신에게 시집을 선물했고, 우표를 붙이는 데에만 쓰던 혀를 다른 데 사용하는 걸 가르쳤기에, 그로 인해 견딜 수 없는 사랑에 빠졌기에, 사랑의 시가 부도수표가 아님을 네루다가 증명해야 하기에 사랑의 결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네루다는 베아트리스에 빠진 마리오를 구원해야 한다. 뚜쟁이 시인이 되어 독설을 내뿜는 장모를 설득해야 하고 쉼 없이 타오르는 마리오의 사랑을 완성시켜야만 한다.
P 49
천둥이 몰아치듯 정치가 나의 일을 중단시켰다. 민중은 내게 삶의 교훈이 되어 왔다. 나는 민중에게 다가갈 수 있다. 시인 특유의 수줍음을 띠고, 수줍어하는 사람답게 두려워하면서. 그러나 민중의 품 안에 안기고 나면 내가 변하는 것을 느낀다. 나는 대다수 참된 민중의 일부고 인류라는 거대한 나무에 달려있는 이파리 중 하나인 것이다.
- 파블로 네루다 -
나는 대다수 참된 민중의 일부고 인류라는 거대한 나무에 달려있는 이파리 중 하나인 것이다.
인류라는 거대한 나무에 달려있는 수많은 이파리 중의 하나라는 시인의 말이 가슴을 친다.
인류라는 거대한 나무의 작은 이파리 하나가 바로 나였구나.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지만 인류의 구성원으로 떨어지는 날까지 매달려 있어야 하는 존재였구나...
시인은 막 태어난 아기를 안아주라는 듯이 마리오의 팔에 음반 재킷을 안겨주었다. 그러고는 펠리컨이 날개를 펄럭이듯 덩실거리면서, 동네 춤판을 주름잡는 장발족 청년들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국의 여인과 시골 처녀들의 따스한 허벅지를 섭렵한 바 있고, 지상의 모든 길은 물론 자신의 시 속의 길까지 다 밟아보았던 두 다리로는 리듬을 맞추었다. 나이 탓에 힘겨워하면서도 연륜에서 우러나는 단아한 세련됨으로 요란한 드럼까지도 감미롭게 승화시키며 춤을 추었다. 마리오는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78쪽
9월 4일 밤 깜짝 놀랄 뉴스가 세계를 휩쓸었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었다. 민주적인 투표로 집권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이었다.
P 99
“유식한 척하는 양반, 유물론자가 뭐요?”
"장미와 통닭 중에서 하나를 골라야 할 때 항상 통닭을 고르는 사람이죠. “
유물론에 대해 이보다 더 명쾌한 정의를 본 적이 없다
장미와 통닭 중 통닭을 선택하는 자가 유물론자 라면
나는 유물론자가 결코 될 수 없다. 나는 장미를 선택할 것이고 그 장미를 선택한 것으로 인해 평생 허기질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통닭대신 장미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p 102
"내가 편지 읽는 것보다 자네가 쪽지 읽는 게 더 오래 걸리는군. “
“장모님은 글을 읽는 게 아니라 삼켜버리잖아요. 글이란 음미해야 하는 거예요. 입 안에서 스르르 녹게 해야죠.”
글을 꿀꺽 삼키지 말고 마치 사탕을 먹듯 입안에서 스르르 녹게 해야 한다.
아마도 나는 글을 입안에서 스르르 녹게 해 본 적이 거의 없는 듯하다
장모처럼 게걸스럽게, 단숨에 삼켜버린....
그로 인해 글들은 내 안에 제대로 스며들지 못하고
위장 안에서 뒤엉켜 뭔지 모를 쓰레기 더미가 되어버린 적이 어디 한 두 번 인가...
P. 108
이 녹음기를 가지고 이슬라 네그라를 거닐면서 마주치는 모든 소리를 녹음해 줘. 우리 집 유령이라도 필요해. 건강이 좋지 않다네. 바다가 필요해. 새들도 아쉽고, 우리 집 소리를 실어 보내주게. 정원에 들어가서 종을 울리게, 먼저 바람에 울리는 작은 종들의 가냘픈 소리를 녹음하게. 그리고 다음엔 큰 종 줄을 대여섯 번 잡아당기라고, 종, 나의 종! 바닷가 종루에 걸려 있는 종만큼 낭랑하게 들리는 말은 없지. 그다음에는 바윗가로 가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담아줘. 갈매기 소리가 들리면 녹음해 주고. 밤하늘의 침묵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까지도.
P116
첫째, 이슬라 네그라 종루의 바람 소리.(바람 소리가 일분쯤 계속된다.)
둘째, 이슬라 네그라 종루의 큰 종을 울리는 소리.(종소리가 일곱 번 울린다.)
셋째, 이슬라 네그라 바윗가의 파도 소리.(아마도 폭풍우가 치던 날에 녹음한 듯, 바위에 거세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편집한 것이다.)
넷째, 갈매기 울음소리( 마리오가 제대로 되지 않자 욕하는 소리 포함)
다섯째. 벌집(거의 삼 분간 윙윙거리는 위험천만한 주 음향이 들리고 배경으로는 개 짖는 소리와 무슨 종류인지 모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가 녹음되었다.)
여섯째, 파도가 물러가는 소리.(녹음의 절정의 순간으로, 큰 파도가 요란하게 모래를 쓸어 가다가 새로운 파도와 뒤섞일 때까지의 소리를 마이크가 매우 가깝게 쫓은 듯하다. 마리오가 내리 쏟아지는 파도 옆을 달리다가 바다로 뛰어들어 파도끼리 절묘하게 섞이는 것을 녹음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일곱째, (분명히 긴박함이 깃든 격앙된 음성이었고 침묵이 뒤를 잇는다) 파블로 네프탈리 히메네스 곤살레스 군 : 갓 태어난 아기가 쩌렁쩌렁하게 우는 소리가 십 분쯤 지속된다)
이슬라네그라의 소리를 녹음한 부분. 종소리, 파도소리 갈매기소리, 벌의 윙윙거림과 같은 자연의 소리 외에 인간적인 마리오의 목소리도 담겨있다. 녹음의 절정은 네루다가 파리로 간 뒤 태어난 마리오의 아들
네프탈리 히메네스 곤살레스의 울음소리다.
이슬라 네그라의 바다가 네루다에게는 시적 영감의 원천이었을 테니 그가 평생을 그리워한 것은 당연하다. 언젠가 몽돌 해변가에서 몽돌이 구르는 소리를 녹음한 적이 있다. 파도치는 소리 외에 반질반질한 몽돌이 구르는 소리, 서로 몸을 비비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일종의 윤율처럼......
124
정확히 백 년 전, 가련하지만 찬란한 시인, 처절하게 절망하던 한 시인이 이런 예언을 썼습니다.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하고 찬란한 도시로 입성하라.”
"저는 예언자 랭보의 예언을 믿습니다. 저는 지리적으로 철저히 격리된 나라의 알려지지 않은 한 지방 출신입니다. 가장 버림받은 시인이었고, 저의 시는 지방적이고 고통스럽고 비를 머금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희망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도달했습니다. 시와 깃발을 가지고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미래는 랭보의 말대로라는 것을 노동자, 시인, 그리고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불타는 인내를 지녀야만 빛과 정의와 존엄성이 충만한 찬란한 도시를 정복할 것입니다. 이처럼 시는 헛되이 노래하지 않았습니다."
저의 시는 지방적이고 고통스럽고 비를 머금고 있지만 항상 인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결코 희망을 잃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도달했습니다. 시와 깃발을 가지고 말입니다.
시와 깃발을 들고 불타는 인내로 무장한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신뢰를 버리지 않고...
p 140
군인들이 네루다 집 근처에 바리케이드를 쳐 놓았다. 그 뒤쪽에 소리 없이 사이렌 불빛만 돌아가고 있는 군용 트럭 한 대가 있었다.... 마리오는 정오까지 그곳에 머물려 군인들의 움직임을 샅샅이 살폈다. 스쿠터를 버려둔 채 이웃집 뒤를 멀찌감치 돌아 선착장에 다다랐다. 맨발로 벼랑 기슭의 모래사장을 따라 네루다 집까지 갔다....
마리오는 약 냄새와 축축한 나무 냄새가 풍기는 이듬 속에서 네루다의 모습을 찾기 위해 문을 반쯤 열고 있어야 했다.(... ) 힘겹게 숨을 쉬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아팠다. 숨을 쉴 때마다 목구멍에 상처가 날 듯했다.
“ 좀 어떠세요, 선생님?”
“죽어가고 있어. 그 외에는 별일 없지.”
...
“이렇게 열이 나니까 프라이팬 위의 생선 같군.”
“곧 열이 내릴 거예요.”
“ 아니, 열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내가 사라질 거야.”
....
“바람이 차요. 선생님 ”
“바람이 찬 게 대수야, 삭풍이 내 뼈 마디마디에 휘몰아치고 비할 바 없이 날카롭고 치명적인 비수에 찔렸는데 창가로 데려다 달라고.”
“여기 그냥 계시죠?”
“ 창문을 열어 봤자 저 아래 바다가 사라지고 없다는 건가? 그들이 바다까지 연행해 갔어?”
P 147
창문 손잡이 위에 놓인 네루다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창을 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떨리는 손가락으로 진한 물질을 더듬고 있는 듯도 했다. 혈관을 맴도는 피나 입안에 고이는 침 같은 물질을, 험한 파도가 바다에 비친 프로펠러를 갈기갈기 찢고 은빛 물고기 떼 번뜩이는 물보라를 일으켰다. 네루다는 그 금속성 물결 위로 물로 만든 집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비의 집이요. 축축한 나무집이었다. 네루다의 끓어오르는 피 속에서 웅성거리던 비밀이 막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검은 물이었다. 그 검은 물이야말로 생명이 근원이고 나무뿌리를 장식하고 있던 거무스름한 수공예품이자 결실의 밤을 일궈낸 내밀한 금은세공품이며, 만물의 모태가 대지라는 확고한 신념까지 준 바 있다. 또 모든 언어가 찾아 헤매고, 고대하고, 적합한 이름으로 명명하지 못해 주변만 맴돌거나 침묵함으로써 명명하던 것이 바로 그 검은 물이었다. 검은 물이 바다를 바라보는 네루다의 집과 사물의 집이었던 시인의 눈, 말의 집이었던 시인의 입술을 이미 복스럽게 적시고 있었다. 무덤을 지나고 난간을 넘고 유해를 가로질러 어느 날 아버지의 관을 쪼갬으로써 삶과 죽음의 비밀을 성찰하게 만든 검은 물이었다. 그 검은 물이 지금 이 순간 시인에게 비밀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름다움과 무(無)가 교차된 검은 물, 쿠데타 발발로 두 눈이 가려지고 손목마다 피를 흘리고 있을 시체들 아래로도 흐를 그 검은 무리 네루다의 입에서 시 한수가 흘러나오도록 했다. 네루다는 자신이 시를 읊고 있는지도 몰랐다.
'비의 집이요. 축축한 나무집이었다. 네루다의 끓어오르는 피 속에서 웅성거리던 비밀이 막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검은 물이었다. 그 검은 물이야말로 생명이 근원이고 나무뿌리를 장식하고 있던 거무스름한 수공예품이자 결실의 밤을 일궈낸 내밀한 금은세공품이며, 만물의 모태가 대지라는 확고한 신념까지 준 바 있다. 또 모든 언어가 찾아 헤매고, 고대하고, 적합한 이름으로 명명하지 못해 주변만 맴돌거나 침묵함으로써 명명하던 것이 바로 그 검은 물'
환각에 빠진 네루다가 바라보는 검은 물과 실제 네루다의 아버지 묘 이장 때 관에서 쏟아진 검은 물을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는 연관시키고 있다.
깊은 밤 바닷가를 거닐면 모든 물이 검게 보인다. 물만 검은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람이 검게 보인다. 검 은 물이 거칠게 출렁이는 낮의 푸른 물의 출렁임과 달랐다. 푸른 물의 출렁거림이 경쾌한 묵직함이라면 검은 물은 낮은 으르렁 거림이거나 눅직한 포효 같은 것이었다,
묘 이장 때 쏟아지던 폭포처럼 쏟아지던 검은 물이라니...
우리 안의 모든 것들이 관 안에서 검은 물로 녹아버린 것
우리 안의 언어들이, 움직임들이, 속삭임들이, 행동들이....... 우리의 가장 존엄스러운 뇌와 우리의 오장육부가 검은 물속에 있다.
하늘의 품에 휩싸인 바다로 나 돌아가노니,
물결 사이사이의 고요가
위태로운 긴장을 자아내는구나.
새로운 파도가 이를 깨뜨리고
무한의 소리가 다시 울려 퍼질 그때가지,
어허! 삶은 스러지고
피는 침잠 하려니.
P150
응급차가 네루다를 산티아고로 싣고 갔다.
도중에 여러 차례 경찰 바리케이드를 통과하고 군 검문을 거쳐야 했다,
1973년 9월 23일 네루다는 산타마리아 병원에서 최후를 맞았다.
사경을 헤매는 동안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있는 네루다의 산티아고 집은 약탈당하고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죄다 박살이 나고, 수도꼭지를 틀어 놓아 집이 잠겼다.
조문객들은 그 난장판 속에 네루다의 시신을 안치해 놓고 밤을 지새웠다.
다음 날 스산한 해가 떠올랐다.
산 크리스토발 언덕에 소 공동묘지까지 가는 동안 장례 행렬을 따르는 사람들은 늘어만 갔다.
마포초 강변의 꽃 장수 여인들 앞을 지날 때는 죽은 시인과 아옌데 대통령을 기리는 구호들이 터져 나왔다. 군부대가 착검을 하고 행렬을 주시하며 따랐다.
네루다의 묘 주변에서 장례식 참가자들은 「인터내셔널」을 합창했다
실제로 쿠데타 직후 우익 과격파들이 이슬라 네그라에 있는 네루다의 집에 난입해 가구들을 모두 부수고, 물을 틀어놓아 대문을 통해 관을 모실 수 조차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슬라 네그라 집에 묻히고 싶다던 네루다의 생전 소원은 군당국에 의해 묵살되고 유해는 차스코나와 가까운 공동묘지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네루다의 마지막 길은 외롭지 않았다. 운구 행렬을 따르는 수많은 민중이 함께 했기에.... 인류라는 거대한 나무에 매달린 수많은 이파리들이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기 애......
p153
마리오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천장을 바라보는 동안 시간은 흘러갔다. 새벽 5시경 문 앞에 차들이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 마리오 히메네스 씨입니까?”
“ 네, 그렇습니다.”
....
“저희와 동행하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죠?”
“일상적인 일입니다.”
마리오는 차를 향했다
마리오는 차에 오르면서 군부대가 키만투 출판사를 장악하고 < 우리 칠레인들 >, <비둘기>, < 칸타루에 타> 등등의 불온 잡지들을 압류하는 중이라고 아나운서가 알리는 것을 들었다
에필로그에 소설적 화자인 내가 「파블로 히메네스 곤살레스의 연필 초상」이라는 시를 <칸타 루에다>의 문학 편집장이었던 그에게 기억하는지 묻는다. 그는 기억하지 못했다.
만일 마리오가 강제 연행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다면 이후에도 수많은 시를 썼겠지만
오랜 시간이 흐르고 <칸타루에다> 편집장이 그의 시를 기억하지 못한 걸 보면 그는 끝내 돌아오지 못한 것이리라.
이슬라 네그라는 산티아고에서 120킬로 미터가량 떨어진 해안 마을인데 ‘검은 섬’이란 뜻이지만 실제 검은 바위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지 섬은 아니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는 인간의 삶은 희로애락이 교차하는 것이니 삶의 활력과 즐거움도 문학의 중요한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영화, 음악, 스포츠 같은 대중문화가 현대인의 삶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한, 예술이 그것을 배제한다는 것은 삶과 예술을 격리시키는 일이라고 보았다. 삶의 온갖 요소가 다 뒤섞인 자신의 미학을 ‘잡탕의 미학’이라고 정의했다.
스카르메타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서 무겁지 않고 ‘가벼운’ 이미지의 네루다를 창조하기 위해 몇 가지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무식한 우체부 마리오와의 우정, 네루다의 시를 이용하여 베아트리스라는 소녀와 결혼에 성공하는 이야기에 인간적인 네루다의 모습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마리오는 시를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의 변화를 겪고, 노동자 집회에서 네루다 시를 낭송하면서 시와 민초를 잇는 역할을 하게 된다.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이들의 것이에요.”
스카르메타는 ‘마리오’의 입을 통해 네루다의 시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칠레인 전체의 것임을
선언한다. 시는 결국 쓰는 자의 것이 아니라 읽는 자의 것이다. 시뿐이겠는가. 모든 문학 작품들이 궁극적으로는 책값을 지불한 독자의 소유인 것이다.
가벼운 것 같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소설 안토니오 스카르메타의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네루다가 마리오에게 메타포의 뜻을 가르치기 위해 비를 하늘이 우는 것이라 비유하며 바다를 잘 관찰하면 메타포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마리오는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마리오의 자각의 순간이다. 드디어 자기 안에 억눌린 것, 감추어진 것들 시를 통해 발화하게 된 순간이다. 마리오가 처음에 네루다의 시를 암송한 것은 여인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함이었지만 점점 마리오는 네루다의 시를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우파 상원 의원 앞에서도 네루다에게 투표하겠다는 말을 아무 두려움 없이 내뱉는다. 가슴 안에 시가 들어오면 사람은 강해지고 단단해지는 모양이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일 포스티노』는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영화가 영상미가 뛰어나다면 소설은 해학적인 묘사, 재치, 톡톡 튀는 메타포, 눅진한 슬픔, 문학적 사유로 가득 차 있다.
1973년 9월 11일 쿠데타가 일어나고 네루는 병사하고 마리오는 연행되는 것으로 마무리된 것으로 보자면 이 소설은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진 ‘ 소설이다.
소설만 그러한가.
대부분의 삶은 ‘열광적으로 시작해서 침울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나락의 정도 차이일 뿐.
세상에 처음 온 우리의 울음소리는 네프탈리 히메네스 곤살레스의 울음소리처럼 우렁찼다.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배경으로 하고.... 그 열광적 울음을 살아가면서 터트랄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삶이 얼마나 단조롭고 무미한가를 생각하게 한다.
네루다는 육체적으로는 사망했지만 이슬라 네그라의 바다처럼 끝없이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의 시는 우리의 가슴을 뒤흔들고, 야릇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삶의 멀미를 경험하게 한다.
마리오 히메네스의 삶을 온통 뒤흔들어버린 것은 네루다의 ‘시’였다
네루다의 유명한 시 『시(詩)』로 마무리하려 한다
『시(詩)』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가
나를 찾아왔어.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 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데,
그렇게, 얼굴 없이
그런 나를 건드리더군,
나를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어.
내 영혼 속에서 뭔가 두드렸어,
열이나 잃어버린 날개
그리고 나 나름대로 해 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난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유성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어둠,
화살과 불로 꽃들로
들쑤셔진 어둠,
소용돌이치는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미소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허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파블로 네루다(본명:리카르도 엘리에세르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
1904-1973. 칠레의 민중시인. 사회주의 정치가.(주)프랑스 대사. 1971년 노벨문학상 수상.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으며 이슬라 네그라의 바닷가에 나는 았었다.
단어들이 이리저리 요동치고, 뒤틀리고, 끝없이 흔들리고...
삶의 멀미를 경험하기까지.............
삶은 결국 하나의 메타포에 불과하다./ 려원
<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괴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