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뻘밭, 새빨간 부표처럼
< 빈 집 >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 잘 있거라.
4월. 빈 집 같은 마음에 기형도의 시가 들어온다.
< 빈 집에 갇혀 나는 쓰네 >
박세미
헐겁게 잠겨 있던 문을 열고 들어와
스스로를 가두고 나는 씁니다
주인을 기다리는 검은 개처럼
허옇게 변해가는 빨래처럼
이곳에서 나는 무엇을 찾고 있습니까
길고 축축한 혓바닥이 되어 온종일 벽을 핥아대도
반쯤 잘린 귀가 되어 천장을 훑고 다녀도
비어 있는
비어 있어
유지되는 모두의 가여운 집
.....(하략)
박세미 『어느 푸른 저녁- 젊은 시인 88 트리뷰트 시집』
헐겁게 잠긴 문을 열고 들어와 스스로를 가두고 쓴다. 검은 개. 허연 빨래처럼...
반쯤 잘린 귀로 천장을 훑고 축축한 혓바닥은 벽을 핥아도
비어있어 유지되는 모두의 가여운 집 같은........
빈 집이다. 단단한 자물쇠로 잠겨있다.
열린 틈 사이로 날씬한 바람만 드나들고 돌아오지 않는 이들에게 편지는 날마다 온다
이 집의 주인은 바로 빈 집.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을까? 지금은 맞고 그때는 맞았을까?
하얀 시멘트벽, 누군가 채점을 해두었다. 겹쳐진 빨간 동그라미, 커다란 노란 동그라미 하나, 그 아래 빨간 동그라미 하나...
생의 성적표인가....
아파트가 곧 들어설 거라고 했다. 여전히 터만 다지는 중...
그러나 이 집은 기억 속의 집. 이제는 세상에 없는 집.... 이미 정답이 아닌 집
절반은 털이 하얗고 절반은 털이 황갈색인 고양이 한 마리 드나든다.
자물쇠는 없다.
폴리스 라인처럼 접근 금지 테이프가 사선으로 붙어있다.
야...... 옹.. 아기울음소리 들리는 회색 대문 집.
얼굴의 절반은 하얗고 절반은 털이 황갈색인 고양이 나른한 오후,
이 집주인은 고양이 부부
회색 줄무늬 고양이 한 마리. 귀를 쫑긋 거리며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들어간다
니야옹.... 아기 울음소리 또 들린다.
빨간 꽃 혼자 피고 진다. 화단 한구석, 고양이 부부의 집.
아무도 없는 것이 아닌 집....
이제는 없는 집, 거대한 포클레인이 휩쓸어 버렸을 집. 기억에서 침몰한 집
고양이 울음소리도 남아있지 않은 집........
아직 건물은 올라가지 않는다. 벌써 몇 년째.
자재값이 급등했다고... 구시렁거리던 누군가의 목소리,
빈 집 같은 바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 빨간 부표 하나 남아있다.
미처 챙기지 못한 짐처럼, 이루지 못한 사랑처럼, 용서받지 못할 말처럼, 녹슨 치욕처럼, 발설해서는 안될 비밀처럼 입을 꾹 다문 빨간 부표 하나...
오래전 내 마음도 저 뻘밭 어딘가에 봉인되어 있을 것이다.
미처 가져오지 못한.
가져올 엄두조차 내지 못한
그 미련한 젊음을..... 고통스러웠지만 때로 찬란하기도 했던..
이 도시의 황량한 봄, 4월에 갇혀있다.
목련 지고, 벚꽃 흐드러진 봄. 대책 없는 날들, 죽은 것 같은 나무에 연초록이 핀다.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기 위해..... 정처 없이 길 잃은 내 손가락....
자판 위를 제멋대로 달려 다닌다.
여전히 두고 온 저 빨간 부표 하나...
"인생의 중간을 알 수 있을까요?"
"알지 못합니다."
"시작도 끝도... 알지 못하는데. 중간을 어찌 알까요."
황갈색 고양이 검은 줄무늬 야옹 소리에 붉은 꽃은 잘도 피고
주인은 오지 않던 집. 그 빈 집에 우편물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도시의 뻘밭, 새빨간 부표 같던.
그 정처 없음들은./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 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