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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하얀 꽃들은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순하고 연하고 보드라운 것들 사이.

하얀 꽃들은  그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빛이 되었다.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봄의 어느 아침, 꽃들을 가득 달고 벚나무가 서 있다. 하얀 꽃들은  그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빛이 되었다. 새들이 그 나무에서 노래했다. 마치 침묵이 그 마지막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쳐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 침묵의 음(音)들을 쪼아 올리는 것이 새들의 노래인 것 같았다.          

나무의 푸른빛 또한 돌연히 나타난다. 한 나무가 다른 한 나무 곁에 푸른빛으로 서 있는 모습은 그 푸른빛이 침묵하면서 한 나무에게서 다른 한 나무에게로 옮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대화할 때 말이 한 사람에게서 다른 한 사람에게로 전해지듯이.

  그렇게 돌연히 봄이 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먼 곳을 응시한다. 말없이 봄을 가져다 둔 뒤에 사려져 버린 그 사람이 아직도 거기에 보이는 듯이 봄에는 사람들의 눈은 먼 곳을 응시한다. 봄의 사물들은 몹시도 연해서 큰 소리를 내며 시간의 단단한 벽을 부수고 나올 필요가 없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봄의 사물들은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스며 나와 돌연히 거기서 나타난다.     

봄의 그 모든 소리들 뒤편에는 시간의 침묵이 있다. 그 침묵은 하나의 벽이다. 아이들의 말은 그 벽에 맞아 튕겨 나온다. 마치 공이 집 벽에 맞아 튕겨 나오듯이

  나무의 꽃들은 아주 가볍게 만들어져서 마치 침묵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침묵 위에 가만히 내려앉으려고 하는 것 같다. 옮아가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침묵에 실려 다음 봄으로 가기 위해서. 마치 새들이 더 멀리 실려가기 위해서 배 위에 내려앉듯이.          


p 129  < 시간과 침묵 > 『침묵의 세계』막스 피카르트          


하얀 꽃들은  그 가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빛이 되었다.        

   

봄비가 내리고 있다.   쌍계사의 벚꽃이 한창 일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연례 의식처럼 모이는 곳. 벚꽃 종교, 벚꽃 신앙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종파도 없는.... 무념무상의 신도들이 그 흩날리는 것 아래서 나무의 침묵을 듣는다.          

 마른 가지에서 쏟아져 나온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그 연분홍빛 하양을 혹은 새하얀 연분홍을 본다. 아무도 모르게  긴긴 시간 나무의 침묵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온 것들이다.

    

꽃은 해마다 돌아오는데 사람은 왜 돌아오지 않느냐는 탄식.

물론 같은 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리라.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웅크리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려 버린 벚나무엔 연초록 잎이 피었다. 연초록이 내려앉은 나무, 몸을 기울여 옆 나무의 어깨에 초록을 덜어준다. 번져나가는 초록들. 아쉽지 않다.

서둘렀으니 후회는 없으리라.

     


도서관 근처에 벚나무가 있었다. 수령이 오랜.  

바람 불면 흩날리던 연하고 순하고 보드라운 잎들이 눈처럼 보였다.     

신축 아파트 공사로 들어가 볼 수도 없는 곳. 도서관 서가엔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았겠지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금단의 장소가 된 곳. 그래도 도서관 뒤뜰 벚나무엔 벚꽃이 만발하겠지     

오래전 비가 내리던 날.... 벚나무 아래 주차해 두고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빌려 나온 사이

내 낡은 차가 꽃차로 둔갑해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가장 찬란한........ 가슴에 안고 나온  몇 권의 책 보다 더 의미 있었던 그 봄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시간이 자꾸만 간다.

그날의 나를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부끄러워진다. 대체 무엇을 했을까

해마다 수없이 반복되는 이 찬란함 속에  나의 침묵이란 얼마나 보잘것없었는지를 생각한다

내 안의 침묵은 내 마른 가지 끝에  매달린 침묵의 체에서 새하얀 것들을 걸러내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이 간다는 것이 두려운 날들이다.


도시의 젖은 하늘 아래 마른 철쭉이 앙다문 입술을 내보인다.

붉은 것을 품고 있다.

이 새하얀 분홍이 흩어지기 시작하면, 새하얀 분홍에 날개가 달려 어디로든 날기 시작하면

철쭉은 입을 크게 벌려 제 목소리를 내겠지. 그 끓어오르는 것들로 4월 그리고 5월 내내  도발하겠지.     


고요하다. 사방이..

다만 새 몇 마리, 가는 나무줄기에 앉아있다가 탄력 있게 날아가는 소리 들린다. /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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