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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닌, 거기가 아닌 곳

이제는 길을 잃고 싶지  않다

아름다움의 감옥 없는 아름다움


여기가 아닌, 거기가 아닌 곳에서 : 너는 듣는다,

바로 지금이라는 다른 시간 속에서

시간의 발걸음 소리를 너는 듣는다

무게도 장소도 없는 현실들을 만들어 가는 시간,  

    

- 옥따비오 빠스 - 「비가 오는 소리를 듣듯이」    

 

인생의 지도 같은 아련한 추상화 앞에 멈춰 서 있다.

여기가 아닌, 거기가 아닌 곳... 거기가 아닌 여기가 아닌 곳이라고 몇 번이고 중얼거렸을 시간들

메마른 담쟁이 길을 따라 걷다가 길을 잃었다. 수시로.

저 붉음의 한가운데로 곧장 달려들지 못하고 자꾸만 멀리 돌아 더 길을 잃어버리고만 시간들이다.

‘후회는 없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다.

수많은 교차로, 수많은 선택지 앞에서

머뭇거리는 사이, 길은 더 아득했다. 뒤엉키고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지금 여기.


시간의 발걸음 소리라도 들으려고 귀를 기울인다.     

담쟁이와 장미, 회색 시멘트 벽은 서로 다른 시간을 산다.

여기가 아닌, 거기가 아닌 곳에서 제각각 기묘하게 들려오는 시간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벽의 시간과 담쟁이의 시간과 장미의 시간이 한 프레임에 들어있지만 같은 시간이라 말할 수는 없다.     

회색 시멘트 벽은 거대한 캔버스, 담쟁이의 메마른 뿌리가 달린 길, 엉겨 붙은 손만 남았다.

 그 위로 빨간 장미 한 송이 솟아있다. 지금은 빨간 장미의 시간, 오직 한 송이여서 더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붉음, 최후의 만찬 같은 시간, 어느 누구도 그 붉음의 확실성을  부정할 수 없다.     

언젠가, 앙상한 담쟁이 줄기가 회색 시멘트 벽의 얼굴을 더듬어 연하고 물렁한 구석을 찾아 담쟁이 푸른 잎이 번져나가면 그 무성한 초록으로 여름을 불러올 것이다.

초록 속에 피어나는 붉은 것들은 그 여름 속에 아마도 더 뜨거울 것이다. 


회색의 기억을 지워버린 온통 진초록의 벽, 그 벽 앞에 서면 나는 또 얼마나 헤매고 있을까.

수직, 수평의 선택지를 지닌 교차로가 사라진 온통 초록 앞에서

초록 속에 허우적거리다 어떤 붉음을 더듬고 있겠지.     

이제는 길을 잃고 싶지 않다. /려원


<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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