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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리기 전에 네 몫의 햇빛을 뜯도록 하라

낡고 빨간 나무 의자에 앉아  carpe diem 을 생각한다

낡고 빨간 나무 의자....          

초록이 앉아있다. 오래도록 앉아있던 의자의 주인은  돌아오지 않는다.

초록이 낡고 빨간 의자 위로 기어오른다.     

모자를 쓴 어르신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의자.

같은 시간대, 늘 나와 계시던 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 새 먼 길을 떠나신 것인가.     

 


흠하나 없이 매끄럽고, 반질반질하던 모습으로 공원에 저 벤치가 처음 놓이던 날..

눈과 비바람과 태양을 마주한 시간. 저 위에 놓인 햇살을 잡아채기 위해 의자는 날마다 분주했으리라. 수많은 이들이 다녀갔다. 어떤 이에게는 잠시, 그리고 또 어떤 이에게는 오랫동안....      

                       

"어둠이 내리기 전에 네 몫의 햇빛을 뜯도록 하라" carpe diem     

고대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쓴 ‘carpe diem'은 ’이 날을 베어라, 따라‘ 혹은 ’ 오늘을 즐겨라 ‘는 의미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실 오늘을 즐겨라는 의미보다는 ‘이날을 따라, 뽑아라, 잡아채라’는 의미가 호라티우스의 생각에 가깝다. 시간은 우리가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고 끝없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흘러간다. 그러하기에 잡아채라는 말이 즐기라는 말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온다       

   


 서구에서는 카이로스의 시간과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나뉜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 시간, 양적인 시간, 객관적 시간, 인간 역사 속에 흐르는 연대기적 시간, 즉 해가 뜨고 지는 결정되는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 시계 시간)’와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 구체적 사건 속에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게 되는 시간,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의미로 적용되는 주관적 시간, 질적인 시간, 기회와 때가 있다는 ‘카이로스(Kairos, 사건시간)’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카이로스는 놓치면 다시 붙잡을 수 없는 ‘기회의 시간’을 말한다. 카이로스 신은 앞머리가 길고 뒷머리는 대머리다. 어깨와 발목에는 날개가 있다. 앞머리가 무성하여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고 뒷머리는 대머리로 시간이 지나면 다시 붙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한다.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이다. 한번 지나간 기회와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는 카이로스적 시간 개념이다. 삶은 변화 없이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와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카이로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하다면 베고, 따고, 잡아채야 하는 호라티우스의 시간은 카이로스적 시간인가? 크로노스적 시간인가?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는  『하룻낮의 행복』에서 카르페 디엠의 의미를 ‘하룻낮(diem)을 베기’보다는 ‘낮의 매 순간을 조금씩 풀을 뜯듯이 천천히 뜯고 잘게 빻아 씹어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낮이 가고 어둠이 내리기 전에 네 몫의 햇빛을 뜯도록 하라...

네 몫의 햇빛을 조금씩 풀을 뜯듯이 천천히 뜯고 잘게 빻아 씹는 일....     


가만히 낡고 빨간 의자에 앉아 있으니  독일의 전위예술가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Horst Wackerbarth) 의 붉은 소파 프로젝트가 떠오른다. 

낡고 빨간 의자는 무슨 질문을 던지고 싶을까? 지금 내게..     


호르스트 바커바르트는 1950년 독일 프리츠라르 출생으로, 카셀 조형 예술 대학 Academy of Fine Arts을 졸업한 뒤 사진작가와 비디오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예술과 미디어의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를 대표하는 작품은 ‘붉은 소파’ 프로젝트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여러 화가들, 영화 제작자들과 함께 각종 전시회나 서적,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등의 분야에서 예술적인 작업을 펼치고 있다.       

 붉은 소파 프로젝트를 통해 알고 싶었던 것, 독자인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소파가 있어야 할 상식적인 장소는 거실이거나 방이거나 사무실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붉은 소파는 빙하 위, 절벽, 숲 속, 길거리 한 복판, 쓰레기장, 폐허가 된 건물, 사과나무 농장.... 눈 덮인 설원이다. 

그의  붉은 소파 the red couch에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편한 자세로 앉아 삶의 질문에 답을 한다. 유명인도 있지만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그런 흔한 이웃들이다. 그들은 이웃집 친구가 묻는 말에 대답하듯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과 없이 말하고 있다. 



 



피터 유스티노프에게 붉은 소파가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묻는다. 

“행복이란 마음속 지평선에 펼쳐진 이상향이 아닐까요. 행복에 실제 다다를 수 없지만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나는 행복한 사람이지만 언제나 행복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신의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붉은 소파가 묻고 제인 구달이 대답한다.

“친구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는 거예요. 그리고 어머니 같은 지구에 인간들이 어떤 행동을 해왔는지 알리는 것, 동물들도 정신과 감정을 지닌 존재임을 알리는 것이 나의 가장 큰 임무이며 가장 가치 있는 일이지요.”     

"당신에게 불행이란 무엇인가?" 

"두 번째 남편이 암으로 죽었는데 엄청난 고통을 호소했는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 "

동물 학자 제인 구달의 인생에  대한 의미는 의외로 단순하다.     


오스트리아의 농부 요한나 한들은 농장 뜰에 놓인 붉은 소파 위에서  당신이 선택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에 대해 '백설공주'라고 대답한다. 백설공주가 되고 싶은 농부 여인의 꿈은 동화적이다.         


아이슬란드의 여고생 클라라 시구르다도티르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생활하는 것이 인생을 가치 있게 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녀에게 '최선'이란 어느 정도일까? 사람들에게 저마다 '최선'의 기준은 다르게 마련인데. 나는 그녀의 '최선 '이라는 단어에 밑줄을 그어놓았다.     


독일 볼프하겐, 연금생활자 에디트 바커바르트에게 묻는다.

"당신이 선택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요?"

"쉰 살, 아니 서른 살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리 된다면 많은 일들을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였을 거예요."

 "사후세계에 대한 당신의 기대는?"     

"내 작은 가방 안에는 서류가 있는데 죽으면 나는 화장될 것이고 내 영혼과 유해는 통합될 것, 내 유골단지는 남편 무덤에 안치될 것이다.라고 적혀있어요."     

에디트는 당신의 선택을 묻는 질문에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가기를 택했다. 시간여행자처럼 돌아간다면 좀 더 잘 살아갈 수 있을까.... 정답은 어디에도 없다.


알리나 시바라는 여인은 당신이 범한 가장 큰 실수를 묻는 질문에 “내가 살아있다는 거. 나는 불행한 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답한다. 살아있음이 불행이라는 그녀의 말에는 진실이 실려있다. "살아있어서 행복하다.", "삶이 행복이죠."라는 상투적인 말을 하는 우리에게 "살아있음이 불행이죠." 진실 어린 충고이기도 하다.          


15살 마약중독자인 디미트루 부르라쿠는 길거리의 폐허가 된 건물, 운하에서 생활한다. 마약에 손을 댔고, 집을 나온 부랑아다. 사후 세계에 대한 당신의 기대를 묻는 질문에 “지옥에나 떨어지겠죠.”

당신에게 의미 있는 일은? "그건 바로 구걸이죠. "          


붉은 소파가 묻는  질문들은 대략 이런 것들이다.

당신의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에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중 최악인 것은 무엇인가?

당신의 가장 큰 바람은?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면 무엇이 되고 싶은가?

사후 세계에 대한 당신의 생각, 행복과 불행, 사랑의 정의에 대해서...          

낡고 초라한  빨간 의자는 내게 무슨 질문을 던질까?

인생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당신의 가장 큰 바람은? 당신의 두려움은? 당신이 선택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무엇이 되고 싶은지?     

나무 아래.... 그저 가만히 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빨간 의자 아래서 질문의 답을 생각한다.

수많은 이들이 다녀간 의자.. 이야기들, 사연들.... 너무 많은 것들을 품다 보니 저리도 낡아버린 것일까?              

의자에 앉아있던 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도란도란 속삭이듯 이야기 나누시던..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머리에 허연 꽃이 피어있던 여인들....

언젠가 더 시간이 흐르면 나도 그러하리라...


철없는 나뭇잎 하나 떨어진다.  가만히 읽던 책을 나뭇잎 곁에 놓아두었다.

“ 어둠이 내리기 전에 네 몫의 햇빛을 뜯도록 하라.”

오늘, 내 몫의 햇빛을 뜯어, 입안에 넣고 오래오래 씹어보리라....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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