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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천명관의 <고래>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천명관의 <고래>    

      

천명관의 장편소설 ‘고래’는 2004년 발표작으로,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작이며, 2023 영국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다.      

평대라는 가상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세상에 대해 복수를 꿈꾸는 노파, 성공과 몰락의 정점에 있었던 금복, 벽돌공장의 여왕이라 불리는 춘희로 이어지는 여인 3대의 이야기다. 애꾸눈, 생선장수, 걱정, 칼자국, 쌍둥이자매, 약장수, 수련, 문, 철가면 등이 부두, 평대, 공장에서 주인공과 맺어가는 인연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훗날, 대극장을 설계한 건축가에 의해 처음 그 존재가 알려져 세상에 흔히 '붉은 벽돌의 여왕'으로 소개된 그 여자 벽돌공의 이름은 춘희(春姬)이다.

.....

다시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몇 년이 흘렀다. 그녀는 홀로 벽돌을 굽고 있었다. 공장을 찾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부 <공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전설 같은 존재 춘희에 대한 서술로 시작해서 춘희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제1 부 : 부두

( 공장/귀물/애꾸/소녀/부두/ 하역부/로라/칼자국/존웨인/괴물/폭풍우/출항/ 유랑/쌍둥이)

제2 부 : 평대

( 개망초/커피/벼락/남발 안/코끼리/ 삼륜차/ 늪/벽돌/통뼈/스캔들/꿀벌/무당/백내장/창부/. 고래/그 혹은 그녀/유령/ 전야/ 불기등)

제3 부 : 공장 

(방화범/ 교도소/ 바크셔/ 철가면/ 왕족/ 출옥/ 귀환/ 골짜기/ 트럭/ 폭설/ 대극장/ 춘희, 혹은 여왕 )     

소설의 1부, 2부는 산골 소녀에서 평대라는 소도시의 기업가로 성공하는 금복의 일대기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 3부는 감옥을 나온 뒤 폐허가 된 벽돌공장에 돌아온 금복의 딸, 춘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수십 개의 에피소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허풍을 섞어 과장된 목소리로 전기수가 들려주듯 때론 황당하고 이해불가인 전개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마치 고전 소설의 편집자적 논평처럼 본문에서도 작가의 개입이 자주 드러난다.      

"이야기란 본시 전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듣는 사람의 편의에 따라, 이야기꾼의 솜씨에 따라 가감과 변형이 있게 마련이다. 독자 여러분은 그저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면 된다. 그뿐이다. "    

옛날에 이런 사람, 이런 사연이 있었다더라, 믿거나 말거나 당신의 마음에 달려있다며 동의를 구한다. 자신은 그저 이야기를 전할 뿐이라며 슬그머니 페이지를 넘기게 만든다. 

설화와 민담, 판타지와 무협, 입에서 입으로 세간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문과 춘희가 묵묵히 만들어낸 견고하고 단단한 벽돌처럼 연결된다. 

금복이 바닷가 마을에서 처음 본 고래가 거대하듯 주인공들의 욕망이 거대하고, 걱정과 춘희의 몸집 역시 거대하며,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 역시 거대하다. 거대함이 만들어낸 서사.     


임철우 소설가는 소설을 관통하는 중심을 격렬하고 파괴적인 욕망으로 보았다.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원초적 욕망의 분신이며 욕망 그 자체로 성공과 몰락을 경험한다.

은희경 소설가는 이 소설의 핵심을 ‘섞임’으로 보았다. 죽은 자와 산자가 뒤섞이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고 고래와 금복. 코끼리와 춘희. 벌떼와 애꾸눈 여자. 국밥과 커피, 남성과 여성, 정착과 방랑, 가짜와 진짜,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인 이야기의 멜팅 팟으로 해석한다

신수정 평론가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노파- 금복- 춘희로 이어지는 여인 삼대, 끝없는 이야기의 퇴적으로 해석한다. <고래>의 신화를 완성하는 이는 여성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노파, 금복, 춘희는 자신의 욕망을 현실 혹은 비현실의 공간에서 실현해 낸다

한 마디로 『고래』는 거대한 욕망, 섞임, 퇴적이 서사라고 볼 수 있겠다.     

저자는 우리의 지난 세기를 떠도는 이야기로 채우고자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노파- 노파의 딸(애꾸)-금복- 춘희 여성의 시간 여성의 역사다. 노파는 전근대적. 금복음 근대. 춘희는 탈근대의 가능성을 상징한다고 설명하는 이도 있다.     

“ 말하자면 여성은 신비가 다 드러나지 않은 거죠. 그 가능성은 아직도 진행형입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단지 젠더로서의 여성뿐이 아니라 역사의 뒤편에 존재했던 마이너리티를 대표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지난 세기, 벽돌을 만든 사람들이죠.”          



나의 할머니는 이제 99세가 되었다.... 그분에게 있어선 세상이 문안과 문밖 둘로 나뉜다. 그 바깥은 잘 모르신다... 그분은 한 세기를 살아왔으며 이제 곧 세상과 작별을 앞두고 있다. 그분의 늙고 작은 몸은 언제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잘 봐두렴. 이게 바로 지난 세기의 인생이란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제 소설이 현실을 포착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리고 질문한다 현실이 이미 거대한 허구가 된 마당에 그 허구의 허구를 보태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서사는 멈춰 섰고 시간은 흩어졌다. 새로운 것은 이미 새로운 것이 아니다. 숙주를 찾아 헤매는 에일리언처럼 작가의 영혼은 아득한 우주 공간을 떠돈다. 그리고 다시 증식을 꿈꾸며 유일한 숙주로 남은 자신의 육체마저 먹어치운다. 그들은 죽기를 각오한 전장의 장수처럼 비정하다. 이 시대에 소설가가 된다는 건 행복한 일일까. 아니면 불행한 일일까?

(중략) 나의 몸속엔 할머니의 유전자가 남아 흐른다. 생명은 그렇게 이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는 계속된다.     

                                                                      제10회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 소감 부분 발췌


수상소감의 첫머리가 나의 할머니는 99세가 되었다로 시작하고 자신의 몸속엔 할머니의 유전자가 남아 흐른다고... 생명이 이어지듯 이야기도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 소설가들의 수상소감과는 다르다.

시나리오를 써왔던 작가여서 일까 그에게 소설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한 징검다리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좋은 시나리오를 쓰려면 다소 과장된, 허풍선 같은 소설이 필요할 테니...     


에필로그 하나

그녀는 영웅도 희생자도 아니었다. 목표를 가진 장인도 아니었으며 숭고한 예술가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녀는 평생 고독 속에 살았다... 단지 그녀는 세상에 벽돌을 남겼을 뿐이다. 그 벽돌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그림을 남겼을 뿐이다. 벽돌에 담긴 그림 속엔 장차 벽돌이 세상에 나가 자신의 마음을 전해주기를 바라는 춘희의 간절한 바람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고래』에서 가장 동적인 인물로 그려진 금복. 산골 소녀가 가출하여 평대를 쥐락펴락하는 여장부(혹은 사내대장부)로 성공한 인물. 전통적 관습을 타파하는 힘을 지녔다.

이 힘의 기저에는 자기부정도 존재한다(여자로서, 춘희의 어미라는...)

여성성을 스스로 파괴하고 남성적인 것을 동경한 결과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모순적 인물이다.  

        

P. 154 금복은 생각이 깊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감정에 충실했으며 자신의 직관을 어리석을 만큼 턱없이 신뢰했다. 그녀는 고래의 이미지에 사로잡혔고 커피에 탐닉했으며 스크린 속에 거침없이 빠져들었고 사랑에 모든 것을 바쳤다. 그녀에게 ‘적당히‘ 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사랑은 불길처럼 타올라야 사랑이었고 증오는 얼음장보다 더 차가워야 비로소 증오였다. 그녀는 걱정의 배 위에 두려움 없이 얹어 놓았던 그 손으로 칼자국의 배에는 거침없이 작살을 꽂아 넣었다. 그렇다면 자식에 대한 어미로서의 사랑은? 그것은 그저 그랬다. 아니 그보다 더 못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춘희는 처음부터 금복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삶 안에 들어와 있는 생명체의 존재에게서 낯선 이물감을 느꼈으며 그것을 더없이 불편하게 여겼다. 더구나 춘희가 걱정의 씨라는 것을 안 이후로는 아이를 더욱 멀리했다. 걱정은 한때 자신이 온몸을 바쳐 사랑한 남자였지만 그것은 무지와 혼돈, 식탐과 어리석은 만용, 비극과 불행의 또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등장인물이 모두 죽는 것인데, 노화로 인한 자연사는 하나도 없고 어이없게, 터무니없게. 참혹하게. 허무하게, 불가사의한 죽음을 맞는다.          

세상에 복수를 꿈꾼 노파는 악령처럼 돌아다니며 복수를 한다. 그녀의 복수는 성공하였을까     

금복은 저고리와 치마를 벗어 빈 덕에 걸어놓고 알몸으로 물속을 향해 걸어갔다. 밤새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차가운 파도가 휘감았다. 그녀는 파랗게 빛나는 고래를 향해 헤엄치기 시작했다. 고래는 거대한 유선형의 몸체를 우아하게 움직이며 그녀를 향해 꼬리를 철썩거리다 이따금씩 힘찬 분기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아무리 헤엄을 쳐도 고래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바로 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었고, 매끄러운 거죽이 손에 잡힐 듯 코앞에서 번들거렸지만 고래는 늘 그만큼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래는 다시 한번 크게 물을 뿜어낸 후 유유히 꼬리를 흔들며 깊은 물속으로 사라졌다. 허탈해진 그녀는 지칠 때까지 물속에서 나오지 않고 다시 고래가 솟아오르길 기다렸지만 끝내 고래는 나타나지 않았다. 완전히 기진해서 그녀가 다시 물 밖으로 나왔을 땐 바다 저편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의 등을 떠밀어 고향을 떠나게 했던 바로 그 바람이었다. 그리고 그 바람은 이제 그녀를 다시 어디론가 데려갈 참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바람을 불렀을지도..     

....

 안에선 사내들이 칼을 들고 어마어마하게 큰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 물고기는 언젠가 그녀가 바닷가에서 보았던 바로 그 대왕고래였다. 사내들이 작두만 한 칼로 거침없이 고래의 배를 씩씩 가르자 피와 내장이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렸다. 거기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구경꾼들은 이리저리 몸을 피해야 했다.           



평대      

 철도가 들어오기 전까지 평대 사람들의 호구책은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을을 통틀어 마지기로 가늠할 만한 전답 하나 없는 데다 그저 믿을 데라곤 그들의 삶을 사방에서 캄캄하게 가로막고 있는 산밖에 없었으니 그저 부지런히 골짜기와 등성이를 따라 수직으로 오르내리며 버섯이나 고사리, 두릅 따위의 나물과 당귀, 복령을 채취하는...     


언제부턴가 선로를 따라 이름 모를 하얀 꽃이 무성하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기차를 타고 낯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찻길 옆에 무슨 꽃이 피든 아무 관심이 없었지만 눈썰미가 있는 사람들 몇몇은, 도대체 저게 무슨 꽃일까, 궁금하게 여겼다. 그것은 바다 건너 멀리 외국에서 들여온 철도 침목에 씨앗을 숨기고 있다      

개망초였다. 춘희의 모든 관심사, 어쩌면 춘희를 닮은.... 벽돌공장은 물론 그녀가 오랜 시간을 보낸 교도소 담장 밑에도, 그녀가 공장으로 돌아오는 기찻길 옆에도 어김없이 피어 있었다. 개망초는 춘희가 방화 혐의로 조사를 받을 때 서명란에 그려 넣은 꽃이기도 하다.     

<개망초는 성곽을 포위한 병사들처럼 늘 공장 둘레를 빽빽하게 에워싸고 있다가, 주인이 자리를 비우자 슬그머니 안으로 침입해 들어와 어느샌가 공장 전체를 점령해버리고 말았다. (중략) 부서져 내린 벽돌가마 틈이나 살림집 마루판자, 검은 이끼가 낀 물결무늬의 슬레이트 지붕 위에도 개망초는 어김없이 피어 있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이었다.>               


춘희는 자신의 인생을 둘러싼 비극을 얼마나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그녀의 육체는 영원히 벗어던질 수 없는 천형의 유니폼처럼 단지 고통의 뿌리에 지나지 않았을까? 그 거대한 육체 안에 갇힌 그녀의 영혼은 어떤 것이었을까?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여줬던 불평등과 무관심, 적대감과 혐오를 그녀는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었을까?     

  

따뜻한 봄이 되자, 그녀는 죽음을 포기하고 다시 먹이를 구하러 나섰다. 그녀는 더 이상 트럭 운전사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 역시 자신을 떠나간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를 원망하지도 않았다. 아니, 그녀는 자신을 임신시켜 놓고 떠난 사내의 무책임과 자신의 고통을 연관 지어 생각할 줄 몰랐다. 그녀에게 있어서 고통은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 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P. 406 그렇다면 왜 그녀는 벽돌을 굽는 일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매달렸을까? 그녀는 그 단조로운 작업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무슨 생각을 한 걸까? 그 작업 안에 어떤 종교적 희원이 담겨 있었다면 그 바람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감동적 이리만치 순정하고 치열했던 그 열정의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진실이란 본시 손안에 쥐는 순간 녹아 없어지는 얼음처럼 사라지기 쉬운 법이다. 그래서 어쩌면 혹, 그 모든 설명과 해석을 유예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그럼으로써 그녀를 단순하고 정태적인 진술 안에 가둬두지 않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것만이, 또 그럼으로써 그 옛날 남발 안의 계곡을 스쳐가던 바람처럼 가볍게 흩어지도록 놓아주는 것만이 진실에 다가가는 길은 아닐까?          


그것은 文의 가족력이었다. 그의 친척들 가운데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사람은 그가 아는 것만 해도 모두 열 명이 넘었다. 그것은 유전의 법칙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올 불운을 미리 알고 있었다. 그는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는 춘희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단다. 내일 당장 소경이 되는 건 아니니까.

눈은 아주 조금씩 멀기 때문에 그동안 나는 많은 것을 볼 수가 있고,

그것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저장할 시간이 남아 있거든. 그러면 나중에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을 하나씩 끄집어내서 볼 수가 있지. 그러니까 그게 꼭 슬픈 것만은 아니란다.       

   


유전의 법칙, 사랑의 법칙... 진화의 법칙. 돈의 법칙, 사회의 법칙. 자연의 법칙.

이 책에는 수없이 많은 법칙이 등장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독자도 은연중 받아들이길 강조하듯...     

재미라기보다는 몰입, 공감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개망초 같은 여인의 삶....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캐릭터 (벽돌장인 문을 제외하고는)는 대부분 성적인 욕망의 응집체로 묘사되고, 반편이거나, 어리석거나 아니면 아주 교활하거나 계산적이다.

여인들 노파, 노파의 딸, 금복, 춘희... 그 어느 누구도 평범하지 않다

주인집 아들의 눈매를 닮았다 하여 부지깽이로 딸의 눈을 찌른 노파, 수련과 놀아나느라 자신의 딸 춘희를 거부하는 금복, 아무 이유도 없이 감방에 수감되어 무자비한 폭력을 당하는 춘희, 쌍둥이 자매... 

냄새 하나로 세상 모든 남자들의 성적인 호기심을 자극한 금복... 추한 외모에 주인집 아들과 성적인 유희를 즐겨 쫓겨난 뒤 복수를 하기 위해 시공을 초월해 수시로 나타나 악행을 저지르는 노파... 부당한 폭력 앞에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춘희...

여성성을 버리고 남성처럼 살아가는 금복이 성적으로 수련을 길들이는 것, 기생집에 드나드는 것.....

논리와 이성으로 이 소설을 읽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비현실적 전개임에도 별 거부감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되는 것은 글의 엄청난 흡입력 때문일 것이다.

    


『고래』라는 소설을 통해 역사적으로 마이너리티였던 여성들의 위치를 소설 속에서나마 후련하게 뒤집어 보고 싶었을지 모른 작가의 노력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 또한 남성적 한계에 갇혀있다.

간혹 금복의 비범함, 사업적 감각을 이야기하지만 금복 스스로 (남자들에게 의탁하지 않고) 일어선 것은 아니다. 커피, 극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칼자루’때문이었고, 생선장수를 만난 덕분에 굶어 죽지 않고 살 수 있었으니... 금복 또한 자신의 몸을 팔아 그때그때 곤란한 상황을 면해왔다. 윈윈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 성공의 바탕은 여성으로서의 몸을 판 것에서 시작하고 어느 정도 생활도 사업도 궤도에 이르자 그녀 스스로 사내들을 거침없이 탐하며 욕구를 충족한다. 이 또한 작가 생각엔 마이너리티로서 여성의 복수인지 모르겠지만 불편한 설정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읽기 힘들었던 것은 노파도, 금복도 아닌 춘희의 삶에 대한 부분이다

코끼리 점보, 문 아저씨만이 춘희를 이해할 뿐 춘희는 살아있는 괴물처럼 취급당한다.

태어날 때부터의 외모가 그녀의 평생 족쇄가 되고,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이기에 감방에서 나와서도 벽돌을 혼자서 빚는다. 벽돌을 빚으면 오래전 평대에 살던 이들이 돌아오리라는 불기능 한 희망을 품고...     


원래 이 작품의 제목을 저자는 붉은 벽돌 여왕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출판사의 협의 후 ‘고래’로 정했다고 한다.

사실 『고래』라는 제목 때문에 스펙터클한 모험이 전개되리라는 기대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품에서 고래와 관련된 부분은 금복의 삶에 주로 집중된다. 자살을 한 거구 걱정이가 고래의 이미지로, 걱정과 금복의 딸 춘희가 고래의 이미지로 그려지고, 금복이 세운 극장 디자인이 고래모양이긴 하지만 작품에서 고래가 갖는 의미를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지만 명쾌하지는 않았다. 금복이 바닷가 마을에서 처음 마주한 고래가... 사람들에 의해 해체되는 과정. 파괴와 파멸의 복선인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공감되는 문장은 

"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는 것이다.


국밥집 노파는 노파가 한 행동에 의해 노파가 되었고

금복은 금복이 한 행동에 의해 금복이 되었고

춘희는 춘희가 한 행동에 의해 춘희가 되었고

약장수는 약장수가 한 행동에 의해 약장수가 되었고

걱정은 걱정이 한 행동에 의해 걱정이가 되었고

칼자루는 칼자루가 한 행동에 의해 칼자루가 되었고...

문은 문이 한 행동에 의해 문이 되었고

평대 사람들은 평대사람들이 한 행동에 의해 평대사람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내가 하는 행동에 의해 내가 된다.     

너무 명징해서 너무 두려운 말이다.


400쪽이 넘는 방대한  소설을 흥미진진하게 빠져들게 하는 작가의 능력.

썩 편하지는 않았던 소설이지만 작가의 거침없는 입담에는 찬사를 보낸다. 

그의 논리대로 라면 소설가는 소설가가 하는 행동에 의해 소설가가 되는 것인가.... / 려원                    


<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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