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이늠의 세상을 꿈꾼다
< 우리가 없는 이튿날에 >
아침에는 안개가 끼고 서늘하겠습니다
서쪽에서 비구름이 몰려와
시야가 흐려지겠습니다
도로는 미끄럽겠습니다
한낮에는
북쪽에서 다가오는 고기압의 영향으로
곳에 따라 점차 날씨가 개는 곳도 있겠습니다
한밤중에는
전국에 걸쳐 화창한 날씨를 보이겠습니다만,
남동부 지방에서는
곳에 따라 비가 내리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기압은 오르겠습니다.
내일은
대체로 날씨가 맑겠습니다만,
여전히 살아계신 분들에겐
우산이 유용하겠으니
외출 시 꼭 챙시기시 바랍니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
열한 번째 시집 『콜론』(2005)에 수록
우리가 없는 이튿날에....
제목부터 서늘하다
아침과 한낮 한밤중, 그리고 내일의 일기예보가 이어진다.
안개, 비구름, 고기압의 영향, 화창한 날씨, 곳에 따라 비, 기온은 떨어지고 기압은 오르고...
내일은 대체로 맑은 날씨지만 여전히 살아계신 분들은 외출 시 우산을 꼭 챙기기를 당부한다
여기가 아닌 저기.
이곳이 아닌 곳. 너머의 세계에서 이곳의 일기예보는 무의미하다
살면서 우리는 끝없이 새벽과 아침과 한낮과 한밤중과 겨룬다.
강박처럼 예보에 집착하고... 준비하고... 다가올 무언가에 대비하고 아마도 평생 동안 비슷한 행위를 반복한다.
폭풍우, 장마, 눈보라, 비바람... 인생에도 맑은 날은 드물다
게다가 인생엔 예보조차 없으니...
우리는 맑은 날에도 인생의 우산을 챙겨야 하고, 바람막이를 챙겨야 한다. 스멀거리며 다가올 두려운 것들에 대비하여야 한다.
우리가 없는 이튿날... 장례식, 누군가가 세상을 떠나고 그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
그가 묻힌 땅에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무의미하다.
우리가 없는 이튿날... 어떤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져도 너머의 세상으로 건너간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살아있는 동안, 존재하는 동안...
숨을 쉬는 동안에만...... 무언가를 할 수 있다.
내일은
대체로 날씨가 맑겠습니다만,
여전히 살아계신 분들에겐
우산이 유용하겠으니
외출 시 꼭 챙시기시 바랍니다
올해 서울 국제도서전의 키워드가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후이늠’이라 한다.
후이늠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비참함이 없는 완벽한 세상'을 지칭한다
유토피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후이늠의 핵심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세계의 비참함이 없는’이다
인간이 얼마나 많은 비참한 것들을 만들어 내는지...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 이 땅에 머물다간 모든 것들이 인간으로 인하여 고통받지 않기를..
그리하여 우리가 없는 이튿날에도 세상은 여전히 살만 것이기를 기원한다.
장마기간이다. 비구름이 몰려오려는지... 습도가 높다.
까마귀 다섯 마리가 낮게 날고 있다. 이렇게 가까이서 까마귀를 보다니...
후각을 스미는 비 내음에 미리 숨을 곳을 찾는 까마귀의 본능이리라..
우리가 없는 이튿날... 슬프지만.. 언제인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가 없는 이튿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7월이 시작되었다..../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