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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이늠Houyhnhnm의 세상도 야후의 세상도...

2024 서울국제 도서전의 키워드는 후이늠 Houyhnhnm이다.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 조너선 스위프트는 ‘후이늠’을 ‘자연의 완성’이라고 정의한다     

걸리버 (Gulliver)는 걸 (Gull : 바보 혹은 잘 속는 사람)과 버(ver: 진실 혹은 진리)의 합성어로 걸리버는 진실을 말하는 바보(거짓말쟁이) 즉 거짓인 것처럼 보이나 실은 진실인 것을 말하는 풍자가를 지칭한다.


심술, 둔감, 무지, 변덕, 호색, 오만, 고집, 무례, 비겁, 야비, 잔인, 사악, 거만, 비굴, 추악, 교활과 같은 말은 인간의 어두운 면을 묘사할 때 쓰는 말이다. 이런 어두운 면들은 인간이 자기만 더 먹고, 더 갖겠다는 욕망을 만들고 서로의 이해에 따라 편을 가른다. 침략, 약탈, 살인과 전쟁은 어둠의 가장 비참한 결과이다. 걸리버는 여행에서 이런 면이 전혀 없는 종족, '후이늠'을 만난다. 이성적, 상식적으로 완벽한 ‘후이늠’의 세상을 만들면, 우리는 전쟁을 그칠 수 있을까? 유능한 인공지능은 우리 미래에 ‘후이늠’이 되어 줄 것인가? ‘후이늠’의 세계가 해법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미래를 그려야 할까?     

우리는 배려, 민감, 지혜, 믿음, 사랑, 유연, 예의, 용기, 격조, 품위, 인정, 겸손, 아름다움, 정직 같은 말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싶다. 2024 서울국제도서전은 독자들과 함께, 우리가 바라는 세상으로 가기 위한 지도를 그린다. 걸리버의 발자취를 따라, 후이늠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세계의 비참’을 줄이고 ‘미래의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서울 국제 도서전- 


후이늠의 세계는 진정한 유토피아인가? 

아무런 향상의 노력도 없고 고여있는 물 같은 사회, 이성의 지배만이 가능한가?

후이늠의 세계는 절제가 지배하는 사회     

후이늠 나라에서 이야기하는 이성이란

“우리가 알고 있는 이성은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만 긍정하거나 부정하라고 가르치며, 우리가 확실히 알지 못하는 건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명제가 거짓되거나 미심쩍은 경우에는 논란, 논쟁, 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후이늠들은 이런 것들을 알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모두 악으로 치부한다. ”          

빵이라는 단어는 빵을 가리키기는 하지만 실제 빵은 아니다. 빵을 가리킬 때마다 실제 빵이 옆에 있어야 한다면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번거로운가. 

언어는 없는 것을 가리키는 기능이 있고 이로 인해 거짓을 말하는 부작용이 생긴다.

후이늠의 주인은 거짓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 대화하는 이유는 서로 이해하고 사실에 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인데 누군가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한다면 대화의 목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주인 말은 하인인 밤색 말을 불러  야후 중 가장 큰 놈을 풀어 마당으로 데려오게 하고 나와 그 짐승의 생김새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여러 번 야후라는 말을 반복했다. 이 추한 짐승이 완벽한 인간의 형태를 지닌 걸 알았을 때 내가 느낀 공포와 놀라움은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사실 그 짐승의 얼굴은 평평하게 넓었고 코는 납작했고 입술은 컸고 입고 넓었다. 야후의 앞발은 별 차이가 없었다. 야후의 우리에서 당나귀 살코기를 가져왔는데 냄새가 불쾌해서 내가 고개를 돌리자 그는 그것을 곧바로 야후에게 던졌고 그 짐승은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치웠다.      


그들의 언어에서 후이늠은 말(馬)을 뜻하며 어원은 ‘자연의 완성’이었다

자연이 왜 스스로가 준 것을 숨기라고 가르쳤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다. 자신이나 가족들은 누구도 몸의 어떤 부분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야후만이 이성을 갖춘 나라가 있을 수 있다면 분명 그가 지배동물일 수밖에 없겠지. 이성은 늘 때가 되면 야만적인 힘을 이기 마련이니까,

“얼굴은 평평하고 코는 돌출되어 있고 눈은 정면을 향하고 있어서 머리를 돌리지 않고서 양옆을 볼 수가 없지. 그대가 먹으려면 무조건 앞발 하나를 들어 올려야 하지 않나? 그래서 자연이 그 필요에 따라 관절을 붙여준 것이고 그런데 나는 그대의 뒷발이 왜 여러 개로 갈라져 있는지 모르겠네. 그대의 몸은 어느 한 군데도 더위와 추위를 맞지 못해 매일 덮개를 걸쳤다 벗어야 하니 그 얼마나 답답하고 곤란한가.”     


이 나라의 모든 동물은 본래 야후를 싫어하네. 야후보다 약한 동물은 야후를 피하고, 야후보다 세면 야후를 몰아내지. 그대는 동족에게 이성이 있다고 했는데 그래도 모든 동물이 그대들에게 품은 반감을 해결하기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다른 동물들을 길들이고 부리는 것 또한 불가능함을 모르는가?     

야후의 사악한 본성을 아는 자라면 야후가 그 모든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쉽게 믿을 걸세. 야후의 힘과 교활함이 그런 악의에 필적한다면 말일세. 그대의 이야기를 들은 후로 야후라는 종족을 더 혐오하게 되었네. 나는 그 나이(이곳에 사는 맹금류)의 잔혹성이나 말의 발굽을 깎아내는 날카로운 돌을 비난하지 않네 원래 그런 거니까.  마찬가지로 이 나라 야후의 혐오스러운 특징도 비난하지는 않네. 하지만 소위 이성적인 체하는 짐승이 전쟁 같은 짓을 벌인다면 극악무도한 일이야. 타고난 야만성보다 정신적 능력의 타락이 더 나쁜 것이니까.     

법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대가 설명했네. 하지만 모든 이를 지키고자 만들었다는 법이 왜 누군가를 몰락하게 만드는지 이해할 수 없네.     

사회의 질서유지, 최소한의 통제로서의 법이 악용되면 다른 누군가를 억압하는 수단이 된다.     


 야후 쉰 마리가 족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다섯 마리에게 던지면 그들은 평화롭게 음식을 먹기보다 음식을 먼저 차지하려고 조바심을 내지. 또 들판의 빛나는 돌을 서로 가지려고 다투는 동안 다른 야후가 나타나 가로채기도 하지. 야후를 가장 끔찍하게 보이게 하는 건 그들의 무차별적 식욕이야. 그 짐승들은 손에 들어오는 건 뭐든지 집어삼키려 하네. 풀, 뿌리, 열매, 짐승의 썩은 살,... 야후란 것들은 집에 있는 음식보다 멀리 나아가 다른 야후의 것, 훔친 음식을 더 좋아한다네. 주인의 말에 따르면 야후들은 어떤 식물 뿌리를 특별히 좋아하는데 이 뿌리를 쭉쭉 빨다가 껴안고 밀어내고 악쓰다가 비틀거리고 마침내 진흙 속에 쓰러져 잠든다고 한다.  

   


고결한 후이늠은 보편적으로 모든 미덕을 갖추고자 하는 선척적 성향을 지니며 이성적 동물에게서는 사악한 면이 드러난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는다. 이성을 함양하고 전적으로 이성의 지시를 따르라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이성은 우리처럼 어떤 문제의 양쪽에서 타당성 여부를 따지는 문제적 인식이 아니라 즉각 확신이 들 정도로 알고 행하는 것이었다. 감정이나 이해관계로 뒤범벅되고 그로 인해 깨달음이 모호해지거나 퇴화하지 않는 확고한 이성이었다.     


후이늠은 전적으로 이성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자식을 교육하고 이웃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처럼 사랑한다. 후이늠 부부는 자식을 남녀 하나씩 낳으면 더는 배우자와 관계를 갖지 않으나 예외적인 싱황에서는 허용된다. 인구과잉을 막기 위함이나 하인으로 자랄 열등한 후이늠은 남녀를 각각 셋까지 낳는 게 허용되며 이 망아지들은 자라서 고귀한 가문의 하인이 된다. 후이늠 나라의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종족의 쇠퇴를 막기 위한 방편이다.  후이늠은 18살이 될 때까지 특정일을 제외하면 귀리와 우유를 먹지 못하고 오전 오후 두 시간 풀을 뜯어먹는다. 절제, 근면, 운동, 청결은 젊은 후이늠이라면 누구나 실천해야 할 가르침이다. 주인은 집안일 몇 가지를 빼놓고 우리가 여자에게 남자와 다른 교육을 시키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종족 절반이 아이를 낳는 일 말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지 않느냐고 했다. 4년마다 나라를 대표하는 회의가 열리는데 여기서 자식의 교환 조정도 이루어진다. 아들만 있는 부부와 딸만 있는 부부가 서로 자식을 교환한다.

     


후이늠들에게는 문자가 없으므로 지식은 모두 입말로 전해진 것이다. 해와 달의 공전으로 한 해를 계산한다. 그들의 건물은 아주 단순하고 조잡하지만 불편하지 않고 추위와 더위로 인한 피해를 잘 막아낸다.     

르누운 : 최초의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죽기 열흘 정도 전 야후들이 끄는 썰매를 타고 이웃들을 답방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안 좋은 것을 뜻하는 단어의 끝에는 늘 야후가 붙는다.

예를 들면 흐늠 야후, 으흐나홀름 야후, 이늘흠나위흘마 야후     


걸리버가 후이늠의 나라를 떠나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6주 만에 인디던 카누를 만들었는데 카누의 겉은 야후 가죽으로 덮었다. 늙은 야후의 가죽은 지나치게 거칠고 두꺼워 최대한 어린 야후의 가죽을 이용했고 물이 들어오지 않게 야후 기름을 발랐다.

"흐누이 일라 니하 마이아 야후"( 조심해 순한 야후야.)

밤색 말이 걸리버를 배웅했다.     


걸리버 여행기의 4번째 이야기 후이늠국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들이다

실천 이성에 바탕을 둔 후이늠 국은 논쟁이나 의견이 필요하지 않고 완벽한 이성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나라. 그러나 후이늠국이 진정한 유토피아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전히 신분제가 있으며 자식을 낳는 문제는 암묵적 통제를 받으며 가정이라는 울타리도 자식교환으로 대체되기도 하니 혈연으로 가족이 구성되는 것도 아니다. 가족 구성원조차도 국가의 통제를 받는다.      

이 책에 묘사된 야후는 문명인과 대비되는 야만인인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야후와 겹쳐보인다. 이익을 위해 전쟁을 불사하고 도덕과 이성보다 감정과 욕망이 우선인 탐욕스러운 종.     

서울 국제 도서전의 키워드가 ‘후이늠’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야후들의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야후)인 시대에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과 이성을 따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완전한 이상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유토피아(Eutopia)의 원래 의미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하지 않은가?

말들이 사는 이상국 후이늠에도 열등한 하인이 될 말이 존재한다는 것,

어떤 이상적인 나라에도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하인이 필요하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순한 야후 걸리버의 항해를 위해 울타리 안에 가둬둔 야후 몇 마리의 가죽과 기름을 이용한다는 것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난민은 끝없이 생겨나고... 전쟁이 아니더라도 일상의 삶.... 저마다의 등에 내려앉은 삶의 무게는 버겁고  세상을 견뎌내는 일은 어렵다.

먹고 살기 위해,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허기, 결핍이 치욕을 허겁지겁 삼키고야 마는 현실..

야후로 살 수밖에 없는 세상, 야후처럼 살아야 하는 현실이 슬프다.

국제도서전의 키워드 ‘후이늠’ 또한 우리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 안타깝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3 원종란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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