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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빛, 광대의 그림자로 살다

나는 영감을 믿지 않는다. 단지 그릴뿐이다. 베르나르 뷔페

천재의 빛과 광대의 그림자

베르나르 뷔페(1928~1999)에게 ‘적당히’‘란 단어는 없다.     


"나는 영감을 믿지 않는다. 나는 단지 그릴뿐이다."라고 했던 그는 혼돈의 시대에 태어나 일찍이 천재로 인정받은 화가다. 18세에 파리의 보자르 화랑에서 열린 ‘30세 미만의 살롱전’에 자화상을 출품했고 라틴식당들이 모여있는 캬르티에 라탱의 작은 서점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이탈리아 로마와 밀라노, 스위스의 바젤, 영국의 런던, 암스테르담 등에서 러브콜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27세인 1955년 프랑스의 미술잡지‘ 꼬네상스 데쟈르’가 기획한 전후의 화가 10인 중 1위에 오를 정도로 인기 절정의 화가였고, 28살에는 프랑스의 최고 작가로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했다.     


후벼내는 듯한 직선적이고 공격적인 선은 그 안의 상처와 불안, 불안에 대한 저항을 암시한다.

 어린 시절 경험한 나치의 파리 점령과 2차 세계 대전 후 시대의 참담함,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오직 어머니에게 의지한 불우한 유년 시절.. 매일 12시간씩 그리며, 평생 80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뷔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 The Painter’였다.  내가 사는 방법은 그림이고 그림은 나에게 숨 쉬는 도구이자, 삶의 지팡이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림에 천착했던 그는 1997년 파킨슨병에 걸려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베르나르 뷔페의 사전엔 ‘적당히’란 없었어요. 온몸으로 상처받으면서도 그림에 자신의 모든 걸 다 쏟아내고 죽었어요.     

광대가 되어버린 천재, '광대의 그림자' 

베르나르 뷔페는 생전 인터뷰에서 '어떻게 기억되고 싶은 지'를 묻자 "아마도 광대일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광대의 짙은 분장 뒤에 불안과 슬픔, 두려움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의 초상을 보았다. 

“광대, 이것은 두려움이다. 그는 그의 얼굴에 그림을 그린다. 우리도 마찬가지다”라고 뷔페는 말했다.    

베르나르 뷔페의 <광대>

펠리컨의 부리 같은 빨간 코와 오리 부리를 연상시키는 주황빛 입술, 균형이 맞지 않은 눈썹

이랑처럼 깊게 파인 골... 푹 꺼진 눈과 초점 잃은 눈동자, 회색빛 얼굴, 검은색 슈트와 하얀 깃...

검푸른 배경 속에 슬픈 눈동자가 도드라져 보인다. 침몰한 배의 유리창에 기대어 구조를 기대하지 않은 채,

심해 깊은 어둠 속....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발걸음 소리를 듣는 남자의 초상화 같은  느낌을 준다.

평생을 광대로 살았으니 더 이상 광대에 집착하고 싶지 않다는 체념의 눈빛. 서럽다.

   


샤를 보들레르의 시 <늙은 광대>          

어디서나 휴가 중인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붐비면서 즐겁게 놀고 있었다. 광대들, 곡예사들, 동물 조련사들, 유랑행 상인들이 그 해의 불경기를 만회하기 위해     

오랫동안 기다려온 성대한 축제의 시기였다. (...)     

진짜  파리 시민인 나로서도 이 성대한 시기를 모든 천막 상점들을 빠짐없이 구경하며 지나게 된다. 사실 이 천막 상점들은 서로 무서운 경쟁을 벌이면서 빽빽 소리치고, 고함치고, 으르렁거린다. 금관악기의 폭발음, 불꽃 터지는 소리들이 뒤섞여있다.     

어릿광대들과 조크리스 같은 희극적 인물들은 바람과 비와 햇살에 그을린 메마른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스스로 과장된 연기애 자신만만한 코미디언들의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몰리에르의 희극처럼 경직되고 무거운 희극적 재담과 농담을 쏟아내곤 했다.(...)     

모든 것이 빛, 먼지, 고함, 기쁨, 소란이었다. (....)     

끝자리에서, 줄지어 늘어선 천막 상점들의 맨 끄트머리에서 마치 자신이 이 모든 호화판에서 유배된 사람이 되어 부끄럽다는 듯한 불쌍한 광대가 눈에 띄었다. 그는 구부정하고 노쇠하고 늙어빠진 인간 폐물의 모습으로 그의 초라한 천막의 말뚝에 기대어 있었다. 그 초라한 집은 미개한 야만인의 집보다 더 비참한 모양이었고, 연기가 나면서 녹아내리는 두 개의 촛불들이 궁핍한 내부를 환하게 비추었다.     


  어디서나 즐거움, 돈벌이, 방랑이 있었고 어디서나 다음 날을 위해 빵이 필요하다는 믿음이 있었고, 어디서나 열광적인 생명력의  폭발이 있었다. 여기에서 절대적 빈곤, 설상가상으로 희극적인 누더기를 걸친 괴상한 옷차림의 초라함은 그 궁핍함으로 인해 주위와 대조를 이루었다.     

비참한 광대는 웃지도 않는다. 그는 울지도 않았고, 춤을 추지도 않았고, 몸짓을 하지도 않았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노래를 부르지도 않았고 즐거움이나 비통함을 나타내지도 않았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만사를 포기하고 단념한 모습이었다. 그의 운명은 끝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혐오스러울 정도의 가난한 집에서 몇 걸음 안 되는 거리에 멈춰 있는 군중과 빛의 움직이는 물결을 향해 얼마나 깊이 있고 잊을 수 없는 시선을 보내고 있는가. (...)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불행한 사람에게 악취 풍기는 어둠 속에서, 너덜너덜한 커튼 뒤에서, 어떤 신기한 재주나 경이로운 묘기를 보여달라고 요청하는 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런 엄두가 나지도 않았다. 고백하건대 나의 이러한 심증이 독자를 웃게 만들지라도 그만큼 그에게 모욕을 줄까 봐 두려웠다. 결국 그 앞을 그대로 지나면서 그의 가설무대 위에 약간의 돈을 놓아두고 그가 나의 의도를 알아차리기를 기대하면서 알 수 없는 소란으로 몰려다니는 엄청난 군중의 물결에 휩쓸려 그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그 광경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 거기서 느낀 나의 갑작스러운 고통을 분석해 보다가 방금 내가 본 사람은 과거에 인기를 누렸다가 자기의 시대가 지난 후에도 살아 있는 늙은 문인이었다는 것을, 친구도, 가족도, 자식도 없이 궁핍한 생활과 대중의 배반으로 타락한 늙은 시인이었다는 것을, 잊기 잘하는 대중이 이제는 더 이상 그의 천막으로 들어가 구경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샤를 보들레르의 시 <늙은 광대>           

축제의 한 복판, 불꽃과 금관악기 소리와 사람들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뒤범벅된... 파리 거리      

과장된 연기를 하는 광대들의 천막을 돌며 누군가는 돈을 쓰며 웃고 누군가는 돈을 벌어 웃는다. 모든 것이 빛, 먼지, 고함, 소란, 유희로 대변되는 순간.   그런데 맨 끄트머리... 아무도 찾지 않는 천막에서 늙은 광대를 발견한다     

“이 모든 호화판에서 유배된 사람이 되어 부끄럽다는 듯한 불쌍한 광대가 눈에 띄었다. 그는 구부정하고 노쇠하고 늙어빠진 인간 폐물의 모습으로 그의 초라한 천막의 말뚝에 기대어 있었다. 그 초라한 집은 미개한 야만인의 집보다 더 비참한 모양이었고, 연기가 나면서 녹아내리는 두 개의 촛불들이 궁핍한 내부를 환하게 비추었다.     

  어디서나 즐거움, 돈벌이, 방랑이 있었고 어디서나 다음 날을 위해 빵이 필요하다는 믿음이 있었고, 어디서나 열광적인 생명력의  폭발이 있었다. 여기에서 절대적 빈곤, 설상가상으로 희극적인 누더기를 걸친 괴상한 옷차림의 초라함은 그 궁핍함으로 인해 주위와 대조를 이루었다."     

 빵을 위한 믿음과 유희가 절정에 이르는 축제의 한 복판 늙은 광대는 인간 폐물의 모습으로 말뚝에 기대어 서있다. 견딜 수 없는 참혹함에 광대의 천막 앞에 돈을 놓고는 도망치듯 나온다. 그리고 돌아오면서 생각한다.     

저 늙은 광대가 한때는 유명한 시인이었음을...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아무것도 없는 추레한 늙은 광대로 남겨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모습이 또한 언젠가 자기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근심이 많아진다는 것임을 느끼는 요즘이다.

홀가분하지 않은 것은... 살아온 시간만큼 내게 들러붙은 삶의 흔적들.... 떼어내기 어려운, 떼어낼 수 없는 흔적 때문이리라.     

해마다 여름을 건너야 한다.

그 여름의 풍경은 늘 다른 표정으로 다가온다.

전혀 거쳐오지 않았던 것처럼 여름은 늘 내게 날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도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아이처럼 웃을 것


      - 최승자  <올여름의 인생 공부> 부분


썩지 않기 위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다르게 사랑하고 감추고 건너뛰고 부정하는 법을? 달관하지도 도통하지도 말고

아이처럼 울고, 아이처럼 웃으란 말....  여름을 건너는 방법이라고 한다

그리할 수 없기에 우리는 광대가 되는 것이리라.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좌절,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얼굴에 비닐을 둘러쓰고 스스로 죽음을 맞이하러 달려간 남자. 베르나르 뷔페...     

천재의 빛처럼 보였으나 결국은 광대의 그림자로 남은 그를 여름의 한 복판에서 떠올린다. /려원 


<사람학 개론을 읽는 시간>  수필과 비평사 (2022)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도서 선정

2023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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